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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쳐 참회하고, 고쳐 실천하자!

밀교신문   
입력 : 2021-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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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합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지혜를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이란 얻어 아는 것이면서도 실천 수행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연기법을 깨달았다고 가정할 때, 깨달아 지혜를 얻어 아는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기법에 따른 행위가 반드시 뒤따라야만 진실로 깨닫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중생들의 고통에 대한 실상을 통찰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지혜를 곧바로 중생제도라는 실천 수행으로 이어졌습니다. 부처님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깨달음이란 그 자체에 그치지 않고, 지혜와 참회 그리고 실천을 통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실천이 배제되거나 실천 없는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그러한 깨달음은 일종의 신비체험일 뿐 불교적 깨달음도 아닙니다.
 
게으르기 짝이 없는 한 젊은이가 있습니다. 오늘 할 일 정도는 내일이 아니라 최소한 일주일 후 아니,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처리도 제 때 하지 못하고 시간 약속도 잘 지키지 못합니다. 그는 몇 번이나 회사에서 쫓겨납니다.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 거리기만 합니다. 벌이가 없으니 용돈도 부족합니다. 가족들마저 그를 멀리합니다. 외롭고 괴로운 나날이 지속됩니다. 어느 날 그는 TV를 보다가 큰 충격을 받습니다. 새벽 3시부터 열심히 일하는 시장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그동안 자기가 얼마나 게을렀는지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습니다. “내일 새벽 무조건 시장으로 나가자. 가서 무슨 일이든 해보자. 그렇게 하다보면 게으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거야.” 그렇게 다짐하고 침대에 누워 멀뚱멀뚱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자정이 지나고 한 시가 되었습니다. 곧 두 시가 되었습니다. 시장에 가려면 이제 세수를 하고 출발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슬며시 잠이 옵니다. “그래. 새털 같이 많은 날, 내일부터 가면 되지.” 그러고는 이불을 덮고 잠이 듭니다. 젊은이는 과연 그 다음날에 시장에 갔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젊은이는 자기가 게으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만큼 반성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을까요? 깨달음에 대한 실천 수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부처님의 법이 들어온 때가 372년입니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중국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과 불경을 보내온 것이 최초입니다. 그러나 근대까지 아니 일부 종단에서는 지금까지도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는 미명 하에 오로지 개인적 깨달음에만 몰두하고 몰두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깨달음 즉 지혜란 관조적이거나 수동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참회와 자비와 같은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행위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간 한국불교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의 이치 탐구에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출가자는 깊은 산속 선방에서 화두를 들고 선에 드는 것을 불교라고 여겼으며, 재가자들은 교리를 공부하고 경전을 해석하고 읊는 것을 불교라고 생각해왔으며, 종종 기복에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더러 깨쳐야만 실천할 수 있다는 논리로써 실천을 다음으로 미루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깨침과 실천은 결코 전후의 문제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우리불교의 이 같은 병통을 알고 지적한 분들도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불교유신론’을 내세워 한국불교의 비종교적·비시대적·비사회적인 인습을 타파하고 혁신하여 시대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진로를 개척함으로써 부처님의 근본법을 실현하자고 주장했던 만해 한용운 스님 같은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관행에 물든 한국불교는 여전히 실천을 깨달음 후의 문제로만 여기고 있었습니다. 결국 해방 후 혼란기에 회당대종사님께서 우뚝 일어나셨습니다. ‘생활불교⸱실천불교’를 모토로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라 깨달아 참회하고 실천하는 종교임을 천명하였습니다. 기원 전후 불교의 대(對) 사회적 소극성을 극복하고 불교의 실천적 역할을 추구했던 대승불교의 이념이 비로소 실현된 것입니다. 회당대종사님 이후 한국불교가 깨우침의 종교에 머물지 않고 깨쳐 실천하는 불교로 제자리를 찾게 된 것입니다. 회당대종사님은 ‘불교란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실천하는 종교라는 것을 다음의 <실행론> 말씀으로 분명히 정의하셨습니다.
 
“심인진리는 깨달아서 실천해야 하는 진리요, 의뢰적(依賴的)인 진리가 아니다. 모든 공덕은 자신의 실천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경우에도 진실하게 배워서 깨닫고 실천하면 진리의 묘득을 증득하게 된다. 심인진리는 아는 마음과 구하는 마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깨닫는 진리이며 실천교이다. 지적(知的)철학은 물질문명의 도구요, 실천철학은 정신문화의 도구이다. 머리로 아는 것은 지식이요, 행해서 아는 것은 지혜이다.”
 
깨쳐 지심참회하고
고쳐 용맹실천하자!
참회와 실천이 없으면 공덕(해탈)이 없다.
참회와 실천이 없으면 화합(평안)이 없다.
참회와 실천이 없으면 발전(혁신)이 없다.
 
덕일 정사/무애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