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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로 본 회당사상 9
대각(大覺)을 이루다대종사의 득병은 세간생활에서 출세간 생활로 인도하는 인연계기였다. 그 때문에 병세를 잡기 위한 현실적 노력은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치병을 위한 노력에 전력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대종사의 수의를 짓고 있는 어느 날 한 인척(姻戚)이 집에 들어서 농림촌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곳에 병고해탈을 위한 수행처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대종사는 절대 거절하였다. 그렇지만 원정각 스승님은 미련이 남았다. 그래서 농림촌의 길목이 되는 내당동에 좋은 의원이 있으니 한번만 가보자고 대종사에게 간청하였다. 대종사는 그 간절한 청에 못 이겨 따라 나섰다. 그 때가 음력 10월 그믐이었다. 대종사가 내당동에 이르자 그 의사는 왕진을 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대종사는 기운을 차리기 위해 논두렁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그러자 원정각 스승님이 여기까지 왔으니 바람을 쏘일 겸 농림촌에 한 번 가보자고 청하였다. 그래서 농림촌에 이르렀다. 대종사가 조용한 길가에 앉아서 ...
2014-04-01 09:54:50
일화로 본 회당사상 8
농림촌에 가는 인연계기를 만나다대종사가 국가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구법순례를 하면서 많은 사찰과 대덕들을 만나면서 식민지상황의 나라에 대한 담화도 나누었다. 그러나 그 직접적인 계기는 일본의 광공업정책과 산미증산정책을 직접 겪으면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실천을 처음에는 자신의 수행정진과 연계시켜서 구체화하였다. 그 일이 계전의 생활이다. 대종사는 상원동으로 이사를 한 후 고향 계전에 전답(田畓)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 밭을 심수전(心修田)이라 하였다. 그 밭은 단순히 곡식을 경작하는 노동의 장소가 아니라, 수행정진을 하는 '마음을 닦는 밭'이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실천행으로서 계전에 머물러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문중(門中)의 재실(齋室·松憲齎, 二松亭)에서 지내면서 수행정진 하였다. 대종사의 계전교화에서 가장 측근에서 도우고 계전교화를 이어받은 분들의 체험담을 전해 듣고, 역시 계전교화 시기에 직접수행을 한 ...
2014-03-03 14:04:12
일화로 본 회당사상 7
쌀 농사를 시작하다대종사는 그 때까지 김두하가 제공한 포항동 집에서 10여 년 간 살았다. 그리고 이때 본인이 마련한 집으로 이사한 것이다. 대종사는 29세(1930) 때인 음력 9월 포항으로 옮겼다.(호적부에는 1931년 1월 27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이사 후에 호적정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 터가 포항면 포항동(남빈동) 487번지이다. 그 일대는 김두하 형제의 땅이 많이 있었다. 대종사는 포항에 이사한지 10년 후 39(1940)세 2월 21일에 새로운 집을 마련하여 이사를 하였다. 그곳이 영일군 포항읍 본정(상원동) 504번지이다. 그것은 사업의 규모가 그 만큼 정상궤도에 올랐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이즈음 대종사는 포목과 제과업을 중심으로 양돈업 등 다양한 사업을 하였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제과공장에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화재를 당하여 공장을 다 태웠는데도 주인인 대종사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걱정을 하면서 찾았다. 그런데 대종사는 죽림사 법당에서 아주 편안한 모습...
2014-01-29 14:41:59
일화로 본 회당사상 6
불법(佛法)을 만나다대종사는 사업의 규모가 넓어가자 자신의 호를 춘농(春 )이라 하고, 사업장을 '춘농상회'라 하였다. 춘농상회에 사랑방을 마련하고 사업뿐만 아니라 지역의 유력 인사들과 경학(經學)도 함께 논의하면서 교유하였다. 사서(四書) 삼경(三經)을 읽고 토론하는 등 인생과 사회의 문제를 논의하였다. 특히 주역과 풍수지리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아마도 식민지 국가의 장래와 국민의 생활상을 염려한 까닭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포항에서 유력 사업가로 등장하였다. 그 즈음 대종사의 36(1937)세 9월(27일)에 조부가 돌아갔다. 조부는 가솔을 이끌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울릉도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대종사의 조모가 돌아간 후(1923년)와 부친이 돌아간 후(1927) 집안의 정신적인 지주(支柱)로서 집안을 다스렸다. 또한 집안의 어른으로 처음에 포항 이사를 반대하기도 하였다. 조부가 돌아가자 모친이 조부의 극락왕생과 가정의 액운을 소멸하기 위하여 포...
2014-01-13 14:12:45
일화로 본 회당사상 5
흰콩과 검은콩 울릉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대종사는 집안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계속 공부를 하였다. 특히 의생(醫生)공부에 관심을 기울였다. '방약합편'(方藥合編) 등의 의서를 읽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부친은 아들의 의생공부를 반대하였다. 그것을 깨달은 대종사는 학교 공부를 계속할 뜻을 세웠다. 그렇지만 집안 사정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 때 집안에서 청년 덕상의 혼사 일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20(1921년)세에 18세의 배씨 규수와 결혼한다. 배씨 가문은 일찍이 울릉도에 입도(入島)하였다. "고종 27(1890)년에 대구인(大邱人) 배상삼(裵尙三)을 도수(道首)로 삼아 도장(島長)을 대리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배씨 가문은 이때쯤 울릉도에 정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고종 건양원년(建陽元年·1896년)에 배계주(裵季周)가 도감(島監)에 임명되고, 광무(光武) 4(1900)년 울릉군으로 개칭되어 군수가 되었다. 배계주는 광무 7(1903)년까지 군수를 하다가 그만 ...
2013-12-03 13:38:02
일화로 본 회당사상 4
구덩이를 파다 대종사의 7세시의 시작(詩作)은 앞길을 예견하는 심비한 메시지이다. 대종사의 사고의 바탕에는 '밝게 사는 원리'가 깔려 있었다. 이것은 '금강정경'의 중심사상이기도 하다. 세상을 어두운 눈으로 보면 어둡게 보이지만 밝은 눈으로 보면 모두가 밝게 보인다. 진각행자가 늘 예참하는 '삼십칠존의 세계'는 밝은 사회건설의 틀을 보여 준다. 그러나 대종사는 이를 "흰 바탕에 단청을 그린다"는 말씀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철학적, 이론적인 언어를 빌려 종조님의 말씀을 조감하여 보면 "마음 하나 천만을 당적한다"는 실상(實相) 반야적[공·空]인 면을 암시하고, '대일경'적인 본유(本有)의 사상을 담고 있다. 그리고 "흰 바탕에 단청을 그린다"는 연기(緣起) 유식유가적(唯識瑜伽的)[유·有]인 면을 암시하고 '금강정경'적인 수생(修生)의 사상을 담고 있다. 이 본유와 수생은 실질적인 삶의 현장에서는 불이(不二)이...
2013-11-01 14:05:08
일화로 본 회당사상 3
흰 바탕에 단청을 그린다회당대종사의 아명(兒名)은 덕상(德祥)이다. 소년 덕상의 마음에는 그 이름처럼 덕이 상서롭게 가득 차 있었다. 그 상서로운 덕이 생각이 되어 시구로 흘러 나왔다. 마음하나[심일·心一]는 '우주의 보편적 생명흐름'을 일컫는다. 마음[心]은 생명흐름이요, 하나[일一]는 보편전일(普遍全一)함을 일컫기 때문이다. 대종사는 나중에 "하나부처님은 시방삼세 하나이라"는 법문을 한다. '하나(부처님)'는 후에 '(대)비로자나부처님'으로 심화되어 간다. 그래서 "비로자나부처님은 시방삼세 하나이라, 온 우주에 충만하여 없는 곳이 없으므로 가까이 곧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먼저 알라"라는 법어가 탄생한다. 우주법계의 '보편 생명성', 이 생명에 대한 사무치는 실감(實感)을 느끼고, 그 경지에 젖어들 때 그것이 바른 생(生)이요, 삶이다. 이 근원의 생(生)에서 분출되는 생명흐름이 제대로 나에게로 흘러오지 않을 때 삶은 제 모...
2013-09-02 11:02:07
일화로 본 회당사상 2
마음 하나 천만을 당적한다 회당대종사는 푸른 바다가 내려 보이는 산기슭 언덕진 곳, 지금은 금강원(金剛園)이라 부르는 사동(沙洞) 중령(中嶺)에서 탄생하였다. 종조 회당대종사의 모친은 월성김씨(양삼·良三·1883계미∼1949기축) 가문 출신으로 매우 자애롭고 사려가 깊었다. 대종사의 외가가 언제부터 울릉도에 거주하였는지 모른다. 외조부(김병두·金秉斗)가 울릉도에 거주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호적도 찾을 수 없다. 대종사의 모친은 지중한 인연으로 회당대종사를 출산하고 열반에 들 때(1949년 8월 9일)까지 뒷바라지하였다. 회당대종사의 삶에는 모친의 정성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회당대종사는 장남으로 탄생하였다. 그리고 위로 누나가 있고 아래로 여동생이 세 명, 남동생이 두 명이 있었다. 그러나 첫째 남동생과 둘째 여동생은 단명하였다. 그래서 실지 2남 3녀의 장남으로 볼 수 있다. 그 당시 대다수 가정은 자녀를 많이 두었으나 단명한 경우는 비슷한 상황이었다. 대종사는 태어나면서 가족...
2013-08-05 10:10:26
일화로 본 회당사상 1
성인봉의 인연한 사람의 생애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이력(履歷)을 총칭(總稱)하여 일컫는 말이다. 한 생애 동안의 이력이 지닌 유기적(有機的)인 체계는 개인의 역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력과 언설(言說) 등이 품고 있는 생각이나 정신의 체계를 사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생명을 가진 유기체와 같다. 역사적 사실은 시대적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의미를 갖게 된다. 역사적 사실은 그 자체가 역사가 아니다. 그 사실의 의미를 유기적, 시대적인 입장에서 보편적으로 이해할 때 역사가 된다. 역사는 사실의 낙엽을 모은 것이 아니라, 그 낙엽이 유기적 입장에서 관계를 가질 때 역사가 된다. 또한 사실이라는 낙엽의 유기적 관계가 지니는 의미를 시대적 상황에서 재해석 될 때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그 해석이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보편성을 가질 때 진정한 역사가 된다. 그러므로 역사는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사실의 체계적 이해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
2013-07-05 09:5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