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 설법 38-불공정진법(佛供精進法)

밀교신문   
입력 : 2021-07-29  | 수정 : 2021-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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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所願)있어 정진할 때 제일시간(第一時間) 빼지 말고 용맹(勇猛)으로 성공하며 성취됨을 알지니라.
 
불공(佛供)을 진각성존은 공양이라 하였습니다. 공양의 첫째가 마음으로 행하는 귀명입니다. 삼보에 서원을 세우고 공양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에게 귀명하는 것은 믿음을 맹세하는 불공이요, 법에 귀명하는 것은 법 실천을 맹세하는 법공이요, 승에 귀명하는 것은 화합을 맹세하는 승공입니다. 현실에서 돌·나무·물·산신·수신·목신·용왕·서낭당·조왕신에 향·초·꽃·과·차를 올리면서 정성을 다하는 것도 자연공(自然供=功)이 되고 신공(神供=功)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칭하여 불공이라 합니다.
 
정진(精進)은 습관(習慣)을 익힌다는 것으로 승(僧)의 습관을 익히는 것은 삼고(三苦)를 해탈하기 위한 정진이요, 보살의 습관을 익히는 것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열반을 위한 정진이며, 부처의 습을 익히는 것은 성불하기 위한 정진입니다. 정진의 정(精)은 ‘자세할’, ‘깨끗할’, ‘정성스러움’의 뜻이며, 진(進)은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진을 해자하면, 진(進)은 새[隹]가 날아가는[辵] 형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새는 허공을 날되 뒤로는 날지 못하고 반드시 앞으로만 날아갑니다. 그러므로 진은 물러섬이 없이 앞으로만 간다는 뜻입니다. 시간의 흐름과 같이 머무를 수도 없고 되돌릴 수 없으므로 쉬엄쉬엄[辵] 가더라도 잘 살피고 최선을 다하면서 자신이 하는 일에 후회가 없도록 올바른 길로 나가는 것이 정진입니다.
 
세간에서 말하는 불공은 재물 얻기를 바라고, 건강과 명예를 얻으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사바세계는 욕심이 근본이 되어 살아가는 세계입니다. 없는 것을 가지려 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고, 아픔에서 벗어나려 하며, 사랑받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본능처럼 알고 있습니다. 욕계에 태어난 중생은 이 본능을 가지는 것이 삶의 정해진 길[定道]이라 생각합니다. 사용할 만큼만 가지고, 노력한 만큼 높은 직위에 머물고, 베풂 만큼 사랑받으려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게을러 노력하지 않고, 남이 가진 것에 시기하고 질투하며, 스스로의 욕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함부로 사용하며, 자기 의견을 고집하여 상대를 무시하고, 화합을 깨트리는 것은 악이 되고 죄업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정도(定道)는 익힌 습관에 따라 반드시 결과가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질 만큼 가지지 못하거나, 누릴 만큼 누리지 못하거나, 받을 만큼 받지 못하는 것은 현재의 노력한 인이 아니라, 지난날의 허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과법을 믿고 정진을 하면 좋은 인은 언젠가는 받게 된다는 것을 믿고 불공하시면 됩니다.
 
불공, 정진, 법을 세분하면 불공은 청정공양으로 서원을 표하는 것이요, 정진은 가르침에 수순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간곡한 서원으로 정성을 다하여 희사하고 용맹심으로 정진하면서 시간을 엄숙하게 지키는 것이 불공정진법입니다. 희사는 탐심을 버리고 바라는 것 없이 하여 자비심을 키우는 것이요, 염송은 진실한 마음이 모아질 때, 지혜가 열리는 것입니다. 농사짓는 것에 비유하면, 희사는 밑 걸음이 되고, 염송은 씨뿌리고 가꿈이 되며, 시간은 추수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가운데 소홀히 생각하기 쉬운 것이 시간 지키는 법입니다. 때아닌 때에 추수하고, 영글지 않은 때에 추수한다면 성실하지 못하며 장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지킨다는 것은 희사보다 염송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정한 시간보다 일찍 심인당에 자리하고, 언제나 정한 시간보다 넉넉하게 염송하며, 시간 중에는 잡말을 하지 말고 오로지 일심으로 염송할 때 서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불공에는 해탈을 위한 정진 불공과 깨달음을 얻는 수행 불공이 있습니다. 재가인은 정진 불공을 많이 해야 하고, 출가인은 수행 불공을 많이 해야 합니다. 진각종 불공은 일상생활 속에서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의궤를 정하여 서원을 위한 정진 불공과 깨달음을 위한 수행 불공을 동시에 하는 불공입니다. 교화하는 스승은 먼저 수행 불공으로 법을 증득한 연후에 정진 불공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해탈을 위한 불공(佛供), 습관을 익히는 정진(精進)을 통합한 말이 불사(佛事)입니다. 불사는 일상을 부처님처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불사(佛事)와 반대되는 말이 마사(魔事)입니다. 불보살과 동류 되는 것을 방해하고, 마(魔)와 함께하기를 바라는 것이 마사입니다. 중생의 서원과 불의 습관을 익히지 못하도록 방해하면서 악의 습관을 즐기도록 사탕발림을 하는 것이 마군이가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마사(魔事)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욕심과 성냄과 무지와 교만과 의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사는 베푸는 마음이 사라지게 하고, 조급한 마음을 일으키며, 자기를 높이고, 믿음을 약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구니들의 최종언어는 ‘불공을 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사는 방법이 있고, 불공하는 사람보다 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하는 등의 사탕발림으로 게으름을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불공 하는 사람보다 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마군(魔軍)이 하는 말을 인정하고 찬성할 수도 있습니다. 복이 많아 부족함이 없고 서원할 것이 없으면 불공하지 않아도 됩니다. 복 많은 사람은 깨달음을 얻는 수행만 하면 됩니다. 복이 엷어 부족함이 많고, 하는 일마다 손해나고 실패가 거듭되는 사람은 반드시 서원 정진[佛供]을 해야 합니다. 중국의 방거사(龐居士)는 가족과 함께 수행길을 떠나면서 전 재산을 동정호에 버리고 떠났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온 가족이 복이 많아 재물과 명예에 초연한 사람들입니다. 싯다르타 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의 가문에 태어났거나 부호의 집안에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해탈 불공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불공 정진과 수행 정진은 모두 마음 고치는 것이 목적입니다. 마음 고친다는 것은 중생의 습관에서 불보살의 습관으로 돌아가는 방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기만의 서원을 위해 소승적 불공을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세끼 밥을 얻기 위한 불공 정진은 중단하고 인류와 자연을 위하여 수행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중생으로 태어난 원인을 깨닫는 정진, 둘째 원인을 소멸하는 참회 정진, 셋째 삼고(三苦)을 벗어날 수 있는 수행 정진을 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수행법을 가장 잘 갖춘 정진법이 비로자나불과 하나 되는 수행이 진언 염송의 삼밀관행(三密觀行)입니다. 참회로 시작하여 참회로 회향하는 수행이 진언수행입니다.
 
불보살의 위에 오르는 제일 좋은 불공이 참회입니다. 참회도 시대 따라 다름이 있습니다. 정법시대와 상법시대의 참회는 현생에 지은 업을 참회하여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앙굴리마라, 제바달다, 주리반특가와 같은 분들이 그 한 예입니다. 그러나 중생업이 두꺼운 말법에는 현생에 지은 업보다도 숙세(夙世)에 지은 업과가 두텁고 무거우므로 깊은 참회를 하지 않고는 해탈도 깨달음도 얻지 못합니다. 깊은 참회를 하는 것은 작은 것에서도 큰 허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틈새의 의심이 생기지 않도록 하며, 자신의 본성을 되찾는 것입니다. 공간으로는 혼자 있으면서도 대중과 함께 있는 것 같이 행동하며, 시간으로는 한 생만을 바라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삼세를 산다는 생각으로 정진하며, 인간으로는 뭇 중생이 함께 해탈해야 한다는 서원으로 정진하는 것입니다.
 
현재 자신의 눈앞에 이익에 급급하지 말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수행 정진하면서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찾는 자성 참회를 중심으로 실천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자연 공간,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모두 나로 인한 것이라, 생각하고 좋은 것은 접어두고, 잘못된 것은 자신이 원인 제공자라 생각하고 참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질 때, 자신은 자연과 만물과 공간과 시간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한 부처가 성불(成佛)하면 국토 모두 성불한다.” 하는 법입니다. 자성 참회로 청정본연(淸淨本然)에 쌓였던 먼지와 번뇌와 무명의 장막이 걷히면, 밝고 맑은 본래의 천진불의 모습이 들어날 것입니다. 천진불로 살아가는 현실은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병고는 병고가 아니며, 불화는 불화가 아닙니다. 고통이 없는 가난이요, 아픔이 없는 병고요, 반목하지 않는 불화로 해탈의 삼고로 자유자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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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 정사/기로스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