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기고문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뀝니다.

밀교신문   
입력 : 2021-07-29 
+ -


thumb-20210323093346_5dc8494a40147fea67195ad3923d2e60_fz8q_220x.jpg

 

깨쳐 참회하고 고쳐 실천하여/내가 바뀌면 남편이 바뀌고/부인이 바뀌고 자식이 바뀌고/부모가 바뀌고 상대가 바뀌고 세상이 바뀝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라는 일인칭대명사의 주체입니다. 남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때도 나는또는 내가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요? ‘는 수억 겁을 윤회하다가 지금 이 순간의 세상에 살고 있는, 광대한 우주에서 티끌 같은 존재로서 다른 하나들과 소통하는 최초이자 최후의 단위입니다. 다른 존재들과 소통함으로써 개별 존재인 는 비로소 세상에서 중요한 한 가닥의 그물코로서 삼라만상이라는 커다란 그물의 한 부분을 맡게 됩니다. 다른 존재와 연결되기 전, 나는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합니다. 다른 를 만나서 또 다른 그렇게 계속 개별 존재들과 연결되어 선()이 되고 면()이 되어 많은 관계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처음 맺어진 관계는 찰나적으로 우리라는 일체감을 형성합니다. 하지만 그런 관계가 늘 아름답게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서로 밀고 당기면서 관계의 주도권을 놓고 투쟁을 시작합니다. 자신만을 향해 끝없이 채우려하고 소유하려고 하며 상대를 길들이려 합니다. 하지만 그게 내 뜻대로만 쉽게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데 어찌 남을 쉽게 내 뜻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되지 않으니 서로 다투다가 상대에게 등을 돌리고 다시 관계 이전으로 돌아가 각자 가 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것이 종말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보통은 다시 참회하고 우리로 다시 회귀하려 노력합니다. 그런 학습과정이 있기에 인간관계는 수억 겁을 지나면서도 대체로 양호하게 이어지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변치 않고 나와 함께 하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입니다.

 

세상의 주체가 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는 세상만사의 시작이고 끝입니다. 내가 세상에 나옴과 동시에 세상이 나와 함께 하고, 내가 목숨을 다하는 순간 나에게 세상의 문은 닫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아난에게 세상에서 의지할 것은 오직 자신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는 우주라는 큰 그물로 보자면 한 코에 지나지 않지만 너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어쩌면 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소중한 이지만 소중하고 절대적인 내가 인생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더러 라고 혼동하는 아상我相에 의해서입니다. ‘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가 곧 인 것으로 아는 마음이 아상입니다. 아상에 대한 <금강경>에서의 부처님 말씀은 이러합니다.

 

아상(我相)이 있는 자는 자신의 명위권세(名位權勢)와 재보예학(財寶禮學·재산과 학문)을 의지하여 높은 사람을 떠받들고 귀한 사람을 대접하며 가난한 자와 어리석은 무리를 깔본다.

 

자신의 명망과 권력의 힘, 그리고 가진 재산과 학문을 내세워 자기보다 힘이 큰 자에게는 끔뻑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는 고자세를 보인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하여 늘 힘 가진 자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만만하다고 느껴지는 대상에게 먼저 제 뜻에 맞추어 변하기를 강요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에 어디 만만한 사람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저 분란을 피하기 위해 수그러드는 척하는 사람은 있지만, 결국 그들도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더 이상 참지 않습니다.

 

한편, 아상이란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라는 존재를 일종의 망상에 의해 조작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능력을 가진 나, 도덕적인 나, 용감한 나 등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향해 적대감을 내보이는 것은 숨기고 싶은 콤플렉스나 트라우마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상이 내가 라고 믿는 일종의 방어기제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과 세상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낸 무기 같은 마음, 그래서 공격을 받는다고 생각되면 ,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엉뚱한 말을 내뱉기도 합니다. 또 남들의 행동이나 생각에 불만을 품고 버럭 화를 내거나 심하게 질책합니다. 그런데 그의 말이 꼭 옳기만 할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 제 눈 안의 들보(아상)는 보지 못하니 상대가 그 질책을 받아들이기는커녕 강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비록 그의 말이 옳다고 해도 나의 언행이 거칠면 반항하게 되는 것도 인지상정이고요.

 

그래서 아상이라는 무기나 갑옷은 라는 존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아상은 남을 이해하거나 남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속성을 점점 강화시키어 불안과 투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를 비롯한 내가 속한 가정과 조직은 늘 지옥 같은 상황을 맞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남들이 바뀌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부터 버려야 하는 겁니다. <보왕삼매론>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하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 원림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라는 존재자체를 부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아상만 버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종조 회당대종사님께서는 <실행론>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상은 유세하는 것이니 아상을 없앤다는 것은 내가 가진 것과 특별한 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유세하는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아상을 버리기 위해서는 먼저 깨쳐야 합니다. 그동안의 내 허물을 알고, 모든 사람은 서로를 되비치며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 같은 존재임을 깨쳐야 합니다. 그러고는 진심을 다하여 참회해야 합니다. 참회가 끝은 아닙니다. 그 마음을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내 주장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남을 인정하고 이해함으로써 조화를 이루고, 조화를 통한 상생만이 너와 나, 그리고 모든 이들을 빛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참회한 것을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렇게 아상을 훌훌 벗어버리고 나의 본심을 그대로 내보이는 것이 변화입니다. 나는 그대로인 채 다른 사람이 자기에 맞추어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참회하여 아상을 버리는 변화를 보일 때 비로소 남편이, 부인이, 자식이, 부모가, 상대가 그리고 세상이 바뀌게 됩니다.

 

덕일 정사/무애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