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각의 세계를 열다

밀교신문   
입력 : 2021-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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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교법의 정비와 종조의 열반

4) 인사행정과 교화사업

(2) 심인당 양식과 교화사업

사제도(師弟道)를 높이기 위해 심인당 내의 청정성을 지키고, 스승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 심인당 경내의 사택은 사제도의 도량으로 하고, 스승 개인 생활의 주택은 심인당 경외에 매입 혹은 건축 등으로 마련하는 방안을 서울심인당부터 실시하기로 하였다(13,11.23). 그리고 남산동심인당에 결계법(結界法)을 실시하고 심인당 신축과 수리에 결계법을 쓰기로 하였다(15,10.15). 결계법은 심인당과 사택을 담장으로 엄격히 분리하고 통로를 별개로 하는 법이다. 또한 심인당 구조양식을 바꾸어서 심인당 출입 현관을 교리에 맞는다는 뜻에서 종(從)으로 결정하였으나(17,3.25) 다시 횡으로 변경하였다(17,4.8). 현관을 횡으로 내면 동쪽으로 출입하게 되어 본존의 예참공양에 어울리게 된다. 

 

심인당 건설과 영선을 담당하고 때로 일반사회의 공사도 청부하여 이익을 얻기 위하여 조직한 대광토건사가 운영이 잘되지 않아 해소하였다. 그 대신에 건축부를 설치하고 토건사의 책임자인 서복(徐鏷)을 건축상무로 임용하였다(13,3.23). 건축부는 다시 심인당 신축 개축 수리 등 공사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 건축공사부로 개편하였다(15,1.11). 대명동 가교사 터에 공사부를 두고 운영하는 중 건축공사부 규정을 공포하여 실시하였다(17,2.27). 건축부에서 심인당 건축과 수리에 필요한 화물자동차를 한대 구입하고, 교통이 불편한 농어촌지역을 순회하고 교화를 독려하기 위해서 지프를 한대 구입하였다(15,11.2). 그리고 교화에 필요한 수익사업으로 매입한 대구매일의 주식을 경북대학교 한덕희에게 무상으로 양도하였다(12,5.26). 교화를 위한 수익사업이 적절하지 않고 또한 외도회사라는 점이 이유였다.


5) 교화의 외연 확대


(1) 세계불교도우의회(WFB)와 국제활동

종단은 초기부터 해외포교에 관심을 가지고 해외 포교기금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제5차 세계불교도우의회’ 개최 소식을 접하고 해외불교활동의 현황을 살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인회의를 열어 공식 대표에 인정(印定) 손규상, 옵서버(통역)에는 손제석을 선정하고 여비는 ‘외지선교회저축금’에서 지출하기로 하였다. 나아가 귀로에는 가급적 인도, 세이론(스리랑카), 대만, 일본 등 각지 불교 발전상을 연구 조사하기로 하였다(12,11.1). 우의회는 태국 방콕에서 진기 12(1958)년 11월 24일에서 30일까지 7일간 열렸다. 한국에는 대종사와 더불어 조계종의 하동산 이청담 서경보와 원불교의 박길진 등이 대표로 참석하였다. 대종사는 다른 한국대표와 함께 여의도 비행장에서 많은 신교도의 환송을 받으며 출발하였다(12,11.22). 그런데 대종사는 출발 전에 진각종의 특수성을 세계인에게 알리려는 의도에서 ‘대한비밀불교진각종지’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였다(12,11.17). 그런데 소책자의 내용 중에는 종조의 사상과 종단의 특수한 교리보다 밀교의 경전과 해설서 등의 내용이 분량의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또한 영어 번역본이 아니어서 가져가지 않았다.

 

대종사는 세계불교도우의회 일정을 성공적으로 끝냈으나 여러 나라의 불교발전 동향을 연구 조사하려는 애초의 계획은 취소하고 신교도들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였다(12,12.3). 그리고 귀국 후에 전국 각 심인당에 ‘대회참석 귀국 보고서’를 발송하고 우의회 내용과 결의사항 등을 알렸다. 귀국 보고서는 19개국의 약 250명의 대표가 참석하여 5개 분과회의를 통하여 ‘룸비니의 복구를 위하여 국제적인 협조와 원조를 제공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중요한 점은 버마(미얀마)의 우 찬 툰 대법관을 1960년 6차 대회까지 회장으로 선출하고 본부를 버마 랑궁으로 이전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각국의 불교 현황을 특성별로 나누고 보고하였다. 세이론, 버마(미얀마), 태국, 일본은 세계적인 불교모범 국가이고, 불교중흥 국가는 네팔, 인도, 불교활동이 활발한 국가는 싱가포르, 말라이제국(말레이시아), 필립핀(필리핀), 홍콩이며, 불교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는 나라는 서구 제국 특히 영국, 불란서(프랑스), 미국 등으로 보고하였다. 또한, 무시 못 할 불교세력이 있는 나라로는 기타 서(西)아시아제국 전부, 예를 들면 월남(베트남), 캄보디아, 중국(대만 중국 서장) 등을 열거하고 있다. 

 

나아가 귀국 보고서는 “첫째, 전 세계에 있어서 불교전망: 불교는 지금 결정적으로 전진하고 있으며 도처에 눈부신 발전을 보고 있다. 둘째, 우리나라의 불교 전망: 종파로 발전한다는 것을 알고 초 종파적으로 연합하면 낙관적이다”는 내용을 결어로 삼고 있다. 그러나 대종사는 보고서에서 우의회 자체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는 밝히지 않고 있다. 

 

세계불교도우의회 방콕대회 참석 결과로서 그 이듬해 태국의 바나래트 스님의 방문을 받았다. 스님은 법라제(法螺製) 화병(花甁) 한 쌍을 선물하였다(13,7.15). 대종사가 우의회 참석 중에 만난 한 외국인의 편지를 받고 쓴 답장의 초안이 남아 있다. 대종사에게 편지를 보낸(13,7.15) 사람은 뎀마에 사는 불교학자로서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다. 대종사의 답신은 한글 초안으로서 실제 보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는 불교의 장서와 문헌 등을 방대하게 소장하고 불교의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미국 예일대학교 종교학과 담당 교수로서 취임을 승낙한 사실도 밝히고 있다. 대종사는 회신 속에 불교에 대한 본인의 견해를 담고 있다. 

 

대종사는 우선 불교가 “단순히 과거의 종교적인 형식사상과 유존(遺存)하는 사찰 탑 불상 등으로 만족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부처님의 참뜻을 받들기 위해서 신교도들의 “보시로써 우리나라 전반에 걸쳐 많은 붓다의 전당을 짓고 오랜 전란으로 인한 궁핍한 생활과 질병의 고통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무명(無明)으로부터 붓다의 가르침을 주입시켜 그들 스스로 구제되어 내적 평화와 물질적인 안락을 도모하도록 전력을 경주하고 있으며, 고대 불경을 현대 말로 요령 있게 알기 쉽게 번역 발간하는 출판 기구와 학교를 설립하는 등 모든 부문에서 우리 사회에 이바지해 가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박사의 계속된 불교 간행물의 출판을 기원하며 박사의 불교활동 및 불교사상에 관한 서신을 주실 것을 바란다. 박사와 다시 국제회의에서나 세계의 어느 곳에서든지 재면할 때까지 상호 간 유대를 가질 것을 확신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불교의 발전을 위해 형식적인 행사나 활동을 넘어서 실질적인 사람과 활동, 그리고 문헌의 국제적 교류에 대한 절실한 뜻을 담았다. 그리고 불교의 초 종파적인 연합체의 구성은 그 바탕에는 각 종파의 뚜렷한 종파성이 전제가 된다는 속뜻도 전하였다. 세계불교 활동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동남아 불교국가의 부처님 탄생절인 양력 5월 15일에 강도불사를 결정하였다(13,4.27). 한국불교는 대한불교총연합회라는 명칭으로 연합활동을 하였으나 참여종단의 적절성 여부로 15개 불교종단이 참여하여 한국불교회를 창립하였다(37,5.3). 종단대표와 불자 200여 명이 동참하여 삼보회관에서 창립대회를 열고 조계종단이 회장을 맡았다. 창립대회에 본 종단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하고 이사(각해 혜일)와 감사(지성)를 맡았다. 

 

한일불교친선협회가 주최하는 한일불교문화교류의 준비회의를 한일불교 관계자들이 참석하여 종단 회의실에서 열고 한국대회를 진기 37(1983)년 4월 서울에서 열고, 제4차 일본대회를 10월에 열기로 잠정 합의하였다(36,10.8). 또한 한일불교친선협회의 한일국제대회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준비위원장 장명, 일본대표 나가노(中野英賢) 회장 등이 참석하여 종단 회의실에서 열고 대회일자(4.21-22)를 확인하고 남북통일과 세계평화기원법회, 그리고 태평양전쟁 전몰자 합동위령제 등 회의 내용을 확정하였다(37,2.26). 한일불교 국제대회의 준비에 따라서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한일 양국 불교지도자와 양국의 많은 신교도가 참석하여 개최하고 남북통일 및 세계평화 기원, 합동위령제 봉행, 학술세미나 등 행사를 가졌다(37,4.22). 한일불교의 교류에 맞추어서 종단의 스승이 일본불교 시찰도 계속하였다. 총인 원정각 등 5인의 원로스승이 일본 진언종의 초청으로 일본불교계를 시찰하였다(30,4.5). 그 후 종조 탄생지 성역화 사업과 진선여중·고 설립 등의 상황으로 일본불교 시찰은 잠정 중단하였다. 원로스승의 일본불교계 시찰 후 현직 스승의 견문을 높이기 위해서 스승의 일본 방문을 종의회에서 결의하여 스승 22명과 신교도 17명이 일본불교계를 시찰하였다(36,4.12). 다시 장명 통리원장이 인솔하여 정사 5명과 신교도 5명이 방일하여 불교계를 시찰하였다(36,10.25). 

 

일본불교계 방문의 결과 스승의 견문을 높이는 데 매우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어나서 종의회에서 전 교직자가 일본불교계를 시찰하기로 결의하여 교직자의 행계 순서에 따라 연차적으로 실시할 계획을 세우고 8일간의 시찰단이 출발하였다(37,4.11). 한일불교 활동과 더불어 세계불교도우의회의 참여도 꾸준히 하였다. 장명 통리원장과 혜일 총무부장이 제12차 세계불교도대회에 참석하였다(32,10.1). 장명 통리원장이 WFB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국제불교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김광태를 통리원에 상주시켜 국제불교 관계를 돌보게 하였다. 그리고 WFB한국연합지부를 인수하고 지부장을 맡아서 본부를 통리원에 두고 간사 경정, 사무총장 김광태를 임명하였다(35,3.23). WFB한국연합지부 총회를 종단에서 열고 임원 12명이 참석하여 한국불교의 세계적 확장을 위해 WFB 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하기로 논의하였다. 그리고 불교서적보내기, 불교 고승과 학자 초청 설법회, 인도 스리랑카 태국 등 성직자 초청 및 유학생 교류지원, 부처님 탄생지 개발지원 등을 논의하였다(25,4.10). WFB한국지부 정기이사회를 개최하고 국제대회 대표단 파견과 경과보고 및 사업계획과 예산 등을 가결하였다(36,7.27). WFB한국지부의 활동에 맞추어서 많은 해외 승려와 학자가 종단을 방문하였다. 

 

인도 상원의원이면서 저명한 불교학자인 로케시 찬드라가 종단을 방문하여 종조전을 참배하고 불교 공동 관심사를 논의하고 불서를 교환하였다. 세계불교승가회 사무총장 마빠라르 아가마와 스리랑카 대(大)승정이며 국립승가 사범대학장인 바즈라 나마가 종단을 방문하고 통리원장과 상호 관심사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36,3.20). 스리랑카 승려의 종단 방문은 계속되어 스리랑카 포교원장 피아디시 대승정(36,11.23), 스리랑카 쌍카 락시따와 영국대각회 총재 사다티사가 종단을 예방하였다(37,6.9). 스리랑카 불교전래 최초사원 주지 쌍가락키타 대승정과 영국 대각회 총재 사다티사 일행은 장명 통리원장과 환담하고 대승과 소승이 화합하여 불교발전과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데 뜻을 모았다.


(2) 사회 참여 활동

종단은 나라발전을 위해서 정부와 정당에 직간접으로 협조하였다. 그런데 혁명정부가 긴급통화조치법을 공포하고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인회 총인회의 상당한 예금이 봉쇄되어 교화발전과 건설에 막대한 지장을 입었다(16,6.10). 재일교포 북송이 나라의 중대 사안이 되어서 재일교포 북송반대 국민궐기대회에 참가하였다. 서울 신교도가 이틀간의 궐기대회에 참석하고, 대구의 신교도는 역전광장의 궐기대회에 300여 명이 참가하였다(13,2.20). 심인불교는 석산섬유공업주식회사와 연합하여 대구역 광장에서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유엔 사무총장, 국제적십자사 위원장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표하고 가두 행진하였다(13,7.9). 그리고 계속하여 궐기대회에 참가하고(13,7.30), 그리고 재일교포 추방반대 국민총궐기대회에도 참가하였다(13,12.3).

 

이즈음 중국의 티베트(서장·西藏)불교 탄압에 반발하여 달라이라마가 인도로 망명하고 티베트 불교도들이 분리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티베트불교의 의거를 지원하여 서울운동장에서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이승만 대통령 유엔사무총장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달라이라마 자유중국 장개석 총통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였다(13,4.23). 또한 대구신교도가 대구역 광장에서 심인중·고등학생과 남녀 신교도 1천 200여 명이 티베트불교도의 의거를 지원하는 궐기대회를 열어 이승만 대통령과 유엔사무총장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고 티베트 지도자 달라이라마에게 보내는 성원문을 통과시키고 가두행진을 하였다(13,4.29). 민족문화 재건운동으로 경북도청에서 개최한 신라문화재건위원회에 진각종, 조계종, 법화종 등 초 종파가 연합하여 참석하여 경주 불국사 입구에 88척의 석가모니불상건립자금 모금방법을 논의하였다(16,12.27). 이에 따라서 경북도청에서 개최한 불상건립촉진위원회에 참가하여 경북 경남 서울의 모금반을 편성하고 위원회 감사를 진각종, 조계종, 법화종이 각기 1명씩 3명을 선출한 후 각 종단의 건립할당액을 결정하였다(17,1.5). 종단은 심인당에 공문을 보내 모금활동을 알리고(17,1.17), 또한 이튿날 대종사의 특별한 담화의 말씀과 함께 불상건립을 위한 강도불사와 상세한 모금방법에 대하여 통지하였다.

 

진기 13(1959)년 9월 추석날 14호 태풍 사라호가 상륙해 양동심인당 사택이 무너지고 심인당은 침수되고, 유금리심인당, 밀양심인당 등 영남 전역의 심인당 신교도가 큰 피해를 입었다(13,9.17). 대종사가 서복을 대동하고 재해지구 심인당의 이재(罹災) 교도를 위문하고 심인당 피해상황을 순찰하였다(13,9.29). 그리고 피해지구를 제외한 심인당에서 수해 이재민(罹災民) 구호품을 모집하여 서울신문에 기탁하였다(1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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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종 역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