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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51

편집부   
입력 : 2017-12-14  | 수정 : 201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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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비용과 육바라밀

삽화=도원 정사

“고(苦)의 원인인 탐진치를 없애고 지비용을 일으키고 육바라밀의 실천을 낙(樂)으로 삼는 것이 인간됨의 길이다. 마음을 모으면 되고 흩어버리면 안 된다. 탐진치를 없애려면 지비용을 일으키고 육바라밀을 실천해야 한다. 독엽(毒葉)과 같은 탐진치도 육행을 실천하면 지비용의 감로가 된다. 좋은 것을 일으키면 나쁜 것이 물러간다.”(실행론 제3편 제6장 제5절)

문을 열다

한쪽 문이 닫히고 나서야 비로소 다른 문이 열린다. 회전문이 아니다. 겹겹이 중복되도록 만들어 놓은 특이한 구조의 출입문이라서 그렇다. 이 출입문으로는 제 아무리 약삭빠른 날짐승이라 할지라도 한꺼번에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다중장치를 해놓은 모양새다. 출입구를 통과하려면 누구나 번번이 나타나는 우선멈춤지역에서 지나온 쪽의 동태를 살필 수밖에 없다. 통과한 출입문의 잠금장치가 확인되지 않으면 그 다음 출입문에는 접근조차 할 수 없도록 키패드가 내장된 채로 은폐돼 있어서다. 철저하게 봉쇄해 놓은 그곳을 출입하기 위해서 이 정도의 수고로움이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주인의 생각이었을 법하다. 누구나 함부로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주장을 은근히 드러내기 위한 효과까지도 숨겨놓은 안정장치인 셈이다.

화복(禍福)의 두 문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복의 두 문 역시 한꺼번에 열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화의 문이 열리면 복의 문이 닫히고, 복의 문이 열리면 화의 문이 닫히게 된다는 말이다. 화와 복의 문이 결코 별개로 존재하는 문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래서 복문 항상 굳게 열면 재화문은 제 스스로 닫혀 지게 된다고 보았다. 좋은 것을 소중하게 지니고 기쁨의 열락을 오래도록 즐기기 위해서는 문단속이 절대적이라는 말도 된다.

선연은 아들 방문 앞을 스쳐 지날 때거나 거실에 앉아서 엿볼 때마다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워 올린다. 인큐베이터 같은 방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천 길 낭떠러지 같은 곳에서 건져 올린 곳이고, 칠흑 같은 어둠의 그림자 속에서 구해낸 곳이 아닌가 말이다. 아들이 나락으로 빠져들면서 한 때는 쳐다보기조차 싫었던 방문이었다. 지금 생각만 해도 끔찍할 정도다. 상상만으로도 언제나 소름이 돋았다.

아들의 방이 폐쇄된 요새처럼 한번 닫혔다하면 좀체 열리지 않았던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됐다. 거실이나 집안 어디에서도 아들은 제 볼일만 마치면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가면서 방문을 걸어 잠갔다. 식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식구들이 모여 앉아 밥을 먹고 있는 도중에도 저 먼저 부리나케 밥을 먹어치운 다음 서둘러 일어났다. 다른 가족의 눈치는 아랑곳없어 보였다. 아들의 행동은 그렇게 정형화되어 갔다. 아들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참다못한 두 살 위의 형이 날을 잡아 심하게 꾸중을 할 때도 그 순간뿐이었다. 꾸중을 들은 아들의 태도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하숙생의 행동도 그 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말들을 했다. 그 정도로 아들의 태도가 심각하다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때그때 잔소리를 늘어놓거나 나무랄 수도 없었다. 반항심만 키워 자칫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어긋날까봐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아들과는 대화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들은 엄마, 아빠는 물론 두 살 위의 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이가 어린 여동생과도 좀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다. 아예 말을 섞지 않으려고 서둘러 피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면서 혼자 있기를 원하는 눈치를 주었다. 자발적 유폐생활을 추구하는 사람 같았다. 누군가가 말이라도 건넬 것 같은 분위기다 싶으면 스르르 자리를 뜨면서 차단하기에 바빠 보였다. 그냥 놔뒀다가는 사람 하나 버리겠다 싶었던 선연은 갖은 궁리를 하다가 친구들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아들을 망가뜨리고 난 뒤에 체면이 뭐 그리 중하며 대수일까 싶은 심정으로 접근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겠다는 마지막 용기를 냈던 것이다.

심인당은 단아해 보이면서도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말끔하게 단장된 성소처럼 보였다. 친구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심인당을 찾았던 선연의 눈에 비친 심인당은 사찰의 법당에 대한 고정관념을 단박에 깨뜨려 버렸다. 서먹하고 겸연쩍기까지 했다. 어색하게 앉아서 취한 자세가 부끄럽기도 했다. 아들 생각만 하면 이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나자 시나브로 마음을 다독일 수 있었다.

아들을 위한 용기도 용기였지만 그동안 가장 믿고 스스럼없이 지냈던 친구와 함께 찾은 심인당이었던지라 의지하는 마음이 더 컸다.
친구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선연도 희사를 하고 염송을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심인당은 평온함을 안겨주었다. 하루에도 열두 번 달아올랐다, 식었다 하던 몸속의 화근도 더 이상 비치지 않았다. 심인당에 앉는 순간 어디로 사라진 듯싶었다. 선연으로서는 새로운 체험이었다. 아들의 그 같은 상황을 보고 있는 엄마의 마음이 오죽하겠느냐만 무엇이 잘못돼서 그런지 그 원인을 찾아서 바르고 고치면 오래가지 않아서 좋아질 것이라는 친구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싶을 뿐이었다. 아들 개인의 문제만 아니라 부모에게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가족 전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친구의 말에 쉬 공감이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친구의 달변이 아니라 어눌한 말투가 오히려 믿음을 주는 듯해 선연은 아무 소리 않고 듣기만 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듯 싶어 무언의 동조를 하는 셈이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다. 친구 따라 심인당에 나갔던 선연은 그 다음 날부터 정성을 다해 희사를 하고 염송을 이어갔다. 희사와 염송은 다분히 희사와 염송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희사로 자비심을 일으키고 염송으로 지혜문을 여는 수행이었다. 선연은 그 가르침을 좇아 탐욕심을 버리고, 성내는 마음을 버리고, 어리석은 마음을 버리기로 애쓰면서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로 했다. 차별심을 없애고, 분별심을 없애고, 업신여기는 마음을 없애기로 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버리는 심정으로 점점 줄여 나갔다.

리트머스용지에 수용액이 스며들 듯이 몸으로 느낄 만큼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선연은 자기가 먼저 변하는 것을 실감했다. 참회하고 정진하는 가운데 비뚤어진 것이 바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에 아들의 방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 순간 선연은 펑펑 울었다. 터져 나온 울음도 참지 않고 솟구치는 눈물도 멈추려 하지 않았다. 몸속에 엉켜 있던 눈물주머니가 한 순간 폭발하면서 모두 분출되는 기분이었다. 참회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졌다.

마음 속 불신의 문이 닫히고 신뢰의 문이 열리면서 아들의 방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더 이상 방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일도 없어졌다. 아들은 외출을 할 때마저 전처럼 방문을 걸어 잠그지 않았다. 자발적 유폐생활을 접고 이제 세상 속으로 나아가겠다는 신호 같아 보였다. 아들의 방문이 열리니 가족들을 걱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문은 닫힌 듯싶었다.

선연은 거실에 앉아 반쯤 열려 있는 아들의 방문을 쳐다보며 그다지 오래되지도 않은 지난날을 되돌아보았다. 심인당을 인연한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던가. 한 때이기는 했지만 아들 때문에 애태운 나날들이 너무나 힘들었고 가슴 아팠던 일이었기에 마치 수십 년은 흐른 것 같은 기억 속의 일들을 지워나갔다. 묵은해를 보내며 이제는 잊어도 될 듯싶어서였다. 순간 한 줄기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진하고 뜨거운 눈물이었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