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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머리

편집부   
입력 : 2017-03-16  | 수정 : 2017-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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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넘게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양방향 원격시동 경보기. 차 문의 잠금상태를 멀리서도 확인 가능하고, 겨울철 엔진예열도 시간 맞춰 할 수 있으니 감사함이란 더 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그 외 잡다한 기능들이 늘 부담이 되고 드물지만 버튼 조작 실수라도 하면 사정없이 울려대는 경보음에 허둥지둥 거리게 된다. 이 정도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또 한 가지 불편사항은 따져 볼만한 사안이 아닐까 한다.

원격시동 상태에서 차문을 일단 열면 정해진 시간(20초) 내에 차 키를 꽂고 on상태로 하지 않으면 시동이 꺼져버린다는 점이다. 짐을 양손에 가득 든 날이 주로 문제인데, 짐에 바닥 먼지를 묻히지 않고는 맞추기 어려운 시간이 20초이다. 밤에는 키 꽂는 곳을 찾아 허둥대다 보면 이 편리한 기기에 이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인가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시동을 꺼뜨리면 괜스레 실패감도 들기 마련이다.

제작사에 문의하니 도난방지를 위해 세팅된 시간이고 개별 조절은 안된다고 하니 업보라고 해야 하나... 차에 익숙한 주인도 허둥댈 짧은 시간인데 도둑은 맥가이버인가 수백 미터를 도망가게. 그것도 쇼트트랙 선수처럼 잽싸게 차 곁에 선 주인을 따돌리고 운전석에 오른 이후라야 가능한 시나리오이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도난문제가 최우선 기준이 되고 주인이 키를 꽂아두는 경우까지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20초는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책상머리 추산의 결과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키를 들고 허둥댈 때면 시동을 꺼뜨리지 않으려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단5초도 늘릴 수 없다는 제작사를 탓하면서 고 신영복 선생이 소개한 ‘목수의 그림’과 ‘차치리’ 일화를 떠올린다.

신영복 선생과 같이 징역을 산 노인 목수 한 분이 땅바닥에 집을 그리게 되었는데 그 순서가 주춧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의 차례였다는 것이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는 관념의 세계(책상머리)에, 집짓는 순서대로 그리는 노인은 실제의 세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신영복 선생은 자신의 서가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옛날 차치리라는 사람이 신발을 사러가기 위해 자기 발의 본을 떴다(이를 탁度이라고 함). 막상 시장에 도착해서 보니 탁을 집에 두고 온 게 아닌가. 되돌아가서 가져왔는데 그만 장이 파해버렸다. 사람들이 직접 신어보고 사면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아무려면 발이 탁만큼 정확하겠습니까?”라고 차치리가 대답했다.

차치리의 어리석음이 다들 남의 일 같이 느껴지겠지만 신영복 선생은 차치리가 곧 우리라고 했다. 그의 표현을 빌면, “주춧돌부터 집을 그리던 노인이 발로 신어보고 신발을 사는 사람이라면 나는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제보다는 현실을 본뜬 관념과 책을 더 신뢰하는 우리가 곧 차치리인 것이다. 노인은 바텀업(아래에서 위로)의 방식으로, 차치리와 경보기 설계자를 포함한 우리는 탑다운(위에서 아래로)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또 살고 있는 것이다. 

유독 소질이 없는 일 중 하나가 화분관리인데, 전문가로부터 원리를 전수받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화분에 물을 위에서 주면 물길로만 흘러내려 고르게 스며들지 못한다고 한다. 아래서부터 차오르게 해야 하는데 곧 물통에 화분을 담그면 된다. 반전의 바텀업 원리는 물주기에도 녹아있었던 것이다.

지지난해 큰 가뭄 때 대통령의 논에 물주기가 구설수에 올랐었다. 여러 대의 소방차를 동원하여 높다란 둑에서 호스로 살수를 했는데, 보여주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물주기 방식이었던 것이다. 어느 기자가 그 논을 추적해 조사했는데 며칠 못 가서 다시 쩍쩍 갈라져 있었다. 물주기 본연의 목적이 우선되었더라면 ‘논에 물을 댄다’는 표현처럼 호스를 그냥 논바닥에 놓았을 것이다.

신재영/위덕대 교육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