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29

편집부   
입력 : 2015-09-01  | 수정 : 201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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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가 곧으면 그림자도 곧다

"마음은 곧 부처요, 부처는 곧 마음이므로 불법은 마음의 법이다. 불법은 체요, 세간법은 그림자가 되어서 체가 곧으면 그림자도 곧고 체가 굽으면 그림자도 굽는다. 내가 과거에 지었던 모든 악업은 다 어리석어 탐하고 성냄으로 말미암아 뜻과 입과 몸으로써 지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죄를 짓던 그 마음을 없애고, 현재에 죄를 짓는 그 마음을 없애고, 미래에 죄를 지을 그 마음을 끊어 없애면 과거 현재 미래의 죄업도 따라서 소멸되고 없어진다. 그러므로 마음이 멸할 때는 죄도 함께 멸한다."('실행론' 제2편 제8장 제1절)

신작로와 수양버드나무

도로공사장과 잇대어 있는 신작로는 끝날 줄 모른 채 이어졌다. 곧게 뻗은 비포장 신작로이기는 했지만 공사장 옆으로 나 있는 임시도로인데다 워낙 골 깊은 시골길인지라 오가는 차량은 거의 없었다. 주변 경치를 구경할 겸 삼아서 자동차를 천천히 운전하고 있을 때 창희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광경 하나가 있었다. 도로공사를 하고 있는 길 가장자리에 덩그렇게 서있는 아름드리 수양버드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창희는 길옆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주차를 한 뒤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도로공사를 하고 있다고, 주의하라고 표시해 놓은 경계선을 조심스럽게 넘어 수양버드나무 곁으로 다가선 창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수양버드나무를 올려다보다가 내려다보고, 주변을 한 바퀴 돌아도 보았다. 그야말로 대물이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5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수양버드나무가 그곳에 있게된 까닭과 고속도로 공사로 졸지에 사라진 한 마을에 얽힌 이야기를 주절주절 담고 있는 표지판이었다.

수양버드나무는 마을 가운데 있던 넓은 공터를 지켜온 오 백년 된 나무라 했다. 마을은 5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며 큰소리 한 번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 정도로 조용한 동네였다. 집성촌이었던지라 이웃이 모두 일가친척이었기에 내 집, 네 집이 따로 없었다. 콩밭에 돋아난 수숫대처럼 한둘 섞여 있는 다른 성을 가진 이웃들도 초록동색이라는 말처럼 나이에 따라 형님, 아우, 아주머니, 아저씨, 하면서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지냈다. 인심 좋은 사람들을 닮아 마을의 지형도 모난 데가 없었다. 줄지어 날아가는 기러기처럼 집과 집은 앞뒤를 마주하거나 옆구리에 서로 잇대어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미꾸라지가 헤엄치듯이 멋 부리는 바 없는, 굽이굽이 휘어져 있는 마을길은 옆을 흐르는 실개천과 짝하며 천하제일의 곡선미를 자랑했다. 오 백년 된 수양버드나무도 그곳 사람들을 닮아서 부끄러운 듯 몸을 꼬고서는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마을 사람들에게 너른 품을 내주었다. 논이며 밭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곡식을 익히기 위해 태양이 작열할 때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농작물의 목이라도 축여줄 겸해서 내리는 굵은 빗방울이 쏟아질 때면 우산이 되어주기도 했다.

마을 한 가운데 있었던 수양버드나무가 새로 닦여진 길 가장자리일지나마 그곳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 의아하게 생각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보호수처럼 관리를 받으며 잘 보존돼 오고 있다는데 놀랄 따름이었다. 마을 전체가 수몰지구로 지정돼 이주하는 경우는 봤어도, 길을 넓혀 고속도로를 내고 경지정리를 하면서 마을을 통째로 이주시킨 경우는 드문 일이 아닌가 싶었다. 아시안하이웨이 길목이라는 말에 마을 사람들 중 어느 누구 하나 토를 달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있었다. 누가 설득을 하고, 설득 당하는 논리가 아니라 이주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말이 도는 순간 단박에 모든 것이 정리됐던 모양이다. 순박하기 그지없는 마을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 것이다. 그 바람에 마을은 이주를 한 곳에서 새로 단장되고, 살림살이는 넉넉해졌으며, 논과 밭은 경지정리가 돼 반듯하고도 넓어졌다.

진행 중인 공사가 완료되면 아시아 32개국을 횡단하는, 14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고속도로망이 연결되게 된다니 벅찬 감동으로 다가오기까지 했다. 눈을 들어 도로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양쪽 길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끝이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공사 중인 도로는 한없이 곧게 뻗어 있었다. 창희는 머지않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시안하이웨이를 질주할 차량행렬을 떠올려 보았다. 국가 간 경계가 사라지면서 대륙으로, 대륙으로 이어지고 연결될 대동맥이 살아 꿈틀거리는 듯하면서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그 때였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행렬 마냥 사람도 건강하기 위해서는 몸 속에 맑은 피가 세차게 흘러야 한다. 혈관이 막힘 없고 깨끗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탁 트인 넓은 길을 보니 옹졸했던 마음은 싹 사라지고 어느새 넉넉해진 기분이 들었다.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으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신작로를 질주하는 자동차가 속력을 잘 내는 것과 같이 시원해지지 않을까, 하는 속짐작을 했다. 소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된 것은 억지가 아니다. 배려할 줄 아는 넓고 큰마음으로 상대를 대한다면 비교적 짧은 순간에도 얼마든지 의기투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됐다. 많은 말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눈빛만으로도 얼마든지 서로의 속마음을 헤아리고, 관심사를 확인하며, 손발을 맞출 수 있는 법. 삐걱거리고, 지리멸렬한 협상은 서로가 좀체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서 원하는 바만 좇아 고집을 피우기 때문이다. 설사 속내를 드러내 보이기까지는 한다고 하더라도 바라는 바가 다르고 견해차가 커 일치된 견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안개 낀 오솔길에서 하는 숨바꼭질에 다름 아닐 것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신작로 협상.’ 창희는 직업병이 도지는 것을 직감했다. 사람을 대하고, 그 사람이 가진 마음을 읽고 나서, 회사의 방침대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여 회사가 원하는 대로 협상을 이끌어가야 하는 상담역이었다. 말이 좋아서 상담역이지 사실은 해결사에 다름 아니었다. 상담역이건, 해결사건 상대의 관심사를 해결해 줄 일이나 도움을 줄 일은 언제나 쉬 결정됐다. 밀치고 당기고 옥신각신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회사 쪽에서 이득을 챙겨야 할 일이거나, 상대 쪽에서 손해를 감수해야할 일은 거칠고 지루한 협상을 해야 하기 마련이었다. 이익을 둘러싸고 손해를 볼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어려운 협상이 될 것이라고 예상됐던 경우도 예외는 있었다. 회사 쪽이거나, 상대 쪽이거나, 한 쪽의 마음이 열려 있을 때는 어렵지 않게 협상이 성사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마음이 통하면 모든 것이 쉬운 법을 터득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마음이 통한다는 것은 서로를 믿고, 서로를 의탁한다는 말과도 어울린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쉬 풀어갈 수 있는 힘이 그 속에는 있다. 믿고 의탁한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상대에게 내줄 수 있다는 자세이기도 하다. 마음이 모든 것이고, 마음이 전부라는 말도 이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일 것이다. 마을을 옮기고 신작로를 내 아시안하이웨이를 닦을 수 있도록 전부를 내준 마을 사람들의 너른 마음 바탕도 그랬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믿음과 오 백년 된 수양버드나무의 묵묵한 의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소중하게 보듬어 왔던 자리를 아무 말 없이 내줄 수 있는 넉넉함이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산으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가장자리를 지키며 다시 숫한 세월을 견뎌야 할 수양버드나무의 무게가 염려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

창희는 오 백년 된 수양버드나무를 오래도록 올려다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자동차를 출발시켜 쭉 뻗은 신작로를 한참 동안 달렸다. 끝없이 이어진, 아시안하이웨이가 될 신작로 마냥 넓고 긴 생각을 하며 모처럼 맞이한 혼자만의 드라이버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무작정 찾았던 한 시골 마을의 신작로를 만난 즐거움이었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