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북한의 현존 사찰

북한의 현존사찰 26 -개성특급시 영통사(중)
개성 영통사 르네상스는 14~16세기까지 유럽에서 일어난 문예 부흥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서양미술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탈리아의 화가 ‘조르조 바사리’가 1550년에 쓴 ‘이탈리아 미술가 열전’에서 처음 언급하였으며, 1855년 프랑스의 역사학자 쥘 미슐레가 ‘프랑스사’에서 <르네상스>라는 학문적 용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불렸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예술, 사상 등을 본받아 인간 중심의 정신을 되살리려는 일종의 시대정신인 르네상스는 고려시대의 현종에서 예종의 재위 기간인 11~13세기에도 이와 같은 문화 혁신운동이 일어났다고 하여 불교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일찍이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화약·나침판·인쇄술 등 세계 4대 발명품과 더불어 ‘고려대장경’의 실제 모습은 고려의 지식문화 르네상스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다. 1011년 2월 보름 청주 행궁에서 발원, 시작된 ‘초조대장경’...
2020-06-22
북한의 현존사찰 25-개성특급시 영통사(상)
개경 북산은 송악산 북쪽의 오관산과 천마산, 성서산 등을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이곳은 고구려 때의 지명으로 ‘크고 깊은 산골짜기를 이룬 곳’이라는 마하갑(摩訶岬)으로 불렸다. 마하갑은 북산의 지명으로 불리는 것과 다르게 서인도의 역경승 바가바드 달마가 658년 번역한 ‘천수경’의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란 산스크리트어 마하(maha)를 한자의 소리음대로 번역한 것이지만, 불가사의한 일ㆍ위대함ㆍ한량없는 뜻으로 쓰이는 것처럼 ‘으뜸가는 큰 골짜기’를 말한다. 또 오스트리아의 과학자 에른스트 마흐가 1883년에 처음 사용한 소리 속도의 단위인 ‘마하수’에서 이름 붙인 마하(Mach)도 한자와 우리말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흔히 마법사의 주문이라 불리는 고대 히브리어 문자 '아브라카다브라(abracadabra)'와도 수리수리 마하수리는 비밀스러운 주문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영통사가 자리한 마하갑은 송악산 줄기를 가리...
2020-06-08
북한의 현존사찰 24-개성특급시 대흥사(하)
옛날 개경으로 불린 개성은 고려 500년의 역사문화가 총화된 곳이다. 또한 “모든 길은 개경으로 통한다”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 소나무가 있는 산이란 송악(松岳)과 푸른 소나무가 있는 고개란 뜻의 청목령(靑木嶺), 고니 새의 목처럼 생긴 고개의 곡령(鵠嶺) 또는 소나무가 많은 송악산을 끼고 있는 도읍지라는 뜻에서 유래한 송도(松都)나 송경(松京) 역시도 개경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 고대도시를 파노라마처럼 바라볼 수 있게 한 사람은 18세기 표암 강세황이다. 사진이 없던 시절에 ‘송도기행첩’이란 그림과 글로써 남겼다. 이 그림이 널리 회자된 것도 개경을 다룬 그림이 한양과 비교하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개국 1년 후, 919년에 고려의 도읍지가 된 개경을 아름답게 소개한 것은 14세기 중엽 이제현의 ‘익재난고’에 <송도팔경>이란 시로 처음 등장했다. 이 글은 1424년 ‘세종실록지리지’ <구도개성유후사>에도 기록됐다. 고...
2020-05-25
북한의 현존사찰 23 _ 개성특급시 대흥사(상)
개성 사람들은 자신들을 ‘개경사람’이라 부르기를 좋아한다. 애향심이 강한 개경사람들은 3월과 10월 세시풍습으로 대흥산성의 돌기를 즐기고 염원했다. 대흥산성을 오르는 ‘순성(巡城)놀이’는 개경사람들이 철쭉이 피는 봄에, 가을에는 단풍 들머리쯤 천마산에 올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놀이다. 나이든 할머니들도 평생에 한 번은 천마산 대흥산성을 타고 박연폭포까지는 걸어서 갔다 와야 할 것으로 알고, 그래야만 저승에서 극락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을 ‘북성지(北城址) 돌이’라고 하는데, 개성에서는 ‘북성기’라고 부른다. 이 북성기는 “한번 가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번 가면 무병장수하고, 세 번 가면 극락에 간다”라는 답성놀이 또는 성밟기인 북성기를 한번 하고 나면, 그 잊을 수 없는 즐거운 추억으로 그 어떤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다시한번 기어이 돌아보고 싶게 한다. 그러므로 대게 두 번은 돌게 된다. 그러나 북성기 돌이는 “한 번을 돌든...
2020-05-12
북한의 현존사찰 22 _ 개성특급시 관음사(하)
우리나라의 관음신앙은 6세기 초, 백제의 승려 발정대사 등에 의해 전래한 이후, 6세기 말에 전국적으로 퍼졌다. 부여 군수리사지에서 출토된 금동관음보살입상은 6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고, 7세기 초기에 조성된 백제의 관음보살상은 현재까지 여러 기가 전한다. 이보다 앞선 419년 중국 동진 시대의 역경승 축난제가 번역한 ‘청관세음보살소복독해다라니주경’이 전해면서부터 널리 퍼졌다. 751년부터 20년간 조성된 경주 석굴암의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은 중국 북주시대의 역경승 야사굴다가 6세기에 한역한 ‘십일면관세음신주경’을 근거로 관음보살 조상이 유행한 대표적 사례다. 당나라 때 아지구다가 654년에 번역한 ‘불설다라니집경’에 근거하여 버들가지를 든 관세음보살인 양류관음 즉, 수월관음을 비롯해 백의관음이 등장하는 등 대중적으로 확산됐다. 고려 충숙왕 때의 왕사 요원이 1331년 저술한 ‘법화영험전’과 같이 당시에 관음신앙이 생활화되었음을 알...
2020-04-20
북한의 현존사찰 21-개성특급시 관음사 (상)
분단 이후, 500명의 남측 관광객은 2005년 8월 26일 개성을 처음 찾았다. 경기도 파주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출발하여 군사분계선을 지나 고려 오백 년 도읍지의 문화유적인 박연폭포, 선죽교, 숭양서원, 고려박물관(성균관), 왕건릉, 공민왕릉 등을 관람하는 시범관광은 당일 코스로 3회에 걸쳐 진행됐다. 2007년 11월부터 관광 시작 1년 만에 11만2천 명이 개성을 갔다. 개성관광은 동해의 금강산과 함께 남북문화교류의 장이었으나, 2008년 11월 28일부터 지금까지 중단되었다. 서울 광화문에서 개성까지는 약 65km이지만, 입경 절차 등으로 인해 도라산 남북출입국사무소(CIQ)를 거쳐 개성 시내까지는 거의 두 시간이 걸린다. 개성에 갈 때 ‘이것’만은 꼭 챙겨야 하는 것은 첫째, 주민등록증과 같은 신분증인데, 발급받은 ‘개성관광증’은 현지에서 신분증을 대신한다. 이 관광증을 훼손하면 벌금을 물게 된다. 둘째, 화폐는 달러와 유로...
2020-03-23
북한의 현존사찰 20-개성특급시 사찰들
신라의 최치원은 “계림(경주)은 누런 낙엽이고, 곡령(송악)은 푸르른 소나무다”며 고려의 건국을 예언했다.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전하는데, 신라 말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고려 후기에도 “이씨가 나라를 얻는다”는 풍수 도참사상이 크게 유행했다. <고려사>에 수록된 왕건의 선대이야기는 풍수도참에 의한 예언으로 “도선은 곡령(鵠嶺)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추려 보고, 세조에게 삼한을 통합할 성자를 낳을 것이니 왕건이라고 이름을 지으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다. 이 예언은 왕건이 918년 6월 15일에 고려를 건국하면서 적중했고, 도읍지 개경이 탄생하였다. 고려의 수도 개경은 인삼, 청자, 대장경과 고려 왕조 500년의 상징이었다. 개경의 진산인 송악산은 555년부터 불렀고, 부소갑(扶蘇岬)·곡령·문숭산 등으로 불렀다. 고구려 때 ‘소나무의 으뜸 산’이란 부소갑으로, ‘열린 성’이란 뜻의 동비홀(冬比忽)이라 <...
2020-03-06
북한의 현존사찰 19-개성특급시 안화사
북한 제3의 도시, 개성은 555년부터 송악산(松嶽山) 자락의 송악으로 불리었다가 919년에 송악현과 개성현 일부를 통합해 개주(開州)라 하고, 왕도가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으로 탄생했다.고려 광종은 950년 즉위 원년에 황제국을 선포하고, 다음 해 개경을 황도라 칭했다. 성종은 995년에 개주를 개성부로 승격시키고 행정지역을 왕경과 경기로 구분했다. 이후 개경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도읍지를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1393년부터 다시 개성(開城)이라 불렸다. 1949년 개성시가 되었고, 1955년 개성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2004년 1월 개성특급시로 명칭이 바꿨다.오늘날 개성은 천년의 고대도시와 고려의 역사로 들어가 첩경이자 실마리다. 중국 송나라의 사신으로 1123년 고려에 들어와 1개월간 개경에 머무르다가 돌아간 다음, <고려도경>을 지은 서긍(徐兢)은 “나라를 세울 때는 반드시 형세를 관찰하여 오래 나라를 유지할 수 있는 곳에 자리 잡는다”고 ...
2020-02-17
북한의 현존사찰 18-강원도 용추사
추지령 용추사 금강산의 산신은 내금강과 외금강, 해금강 이외에 또 하나의 비경을 바닷가에 숨겨 놓았다. 해금강으로 불리지만 엄연히 다른 곳이 총석정(叢石亭)이다. 총석정은 강원도 통천군 고저읍 총석리 바닷가에 있는 정자 이름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주상절리로 이루어진 바위기둥들과 절벽을 일컫는다. 총석대는 바다의 해룡들이 금강산에 오르지 않을 만큼 경치가 아름다워서 사람들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수만 개의 천 길 장대를 세워놓은 곳이라 전한다.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총석정은 고을 북쪽 18리 지점에 있다. 수십 개의 돌기둥이 바다 가운데 모여 섰는데, 모두가 육면이며 형상이 옥을 깎아 놓은 듯한 것이 무릇 네 곳이다. 정자가 바닷가에 있어 총석에 임하였기 때문에 총석정이라 이름하였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신라 때의 술랑ㆍ남랑ㆍ영랑ㆍ안상의 네 신선이 이곳에서 놀며 구경하였기 때문에 이름하여 사선봉이라 한다”고 했다. ...
2020-01-31
북한의 현존사찰 17-강원도 명적사
속고산 명적사 흔히 원산은 함경도의 땅이라 불렀다. 강원도라고 하면 깜짝 놀라는 이들이 더 많다. 그만큼 우리에게 함경도 원산으로 익숙한 도시다. 지금, 원산은 강원도의 도 소재지다. 1946년 9월 함경남도에서 강원도로 편입되고, 도의 소재지도 철원에서 원산으로 옮겨졌다. 1950년 전쟁 때, 더 유명해진 원산은 인천과 부산항과 같이 1878년 ‘강화도조약’에 의해 강제로 개항된 무역항이다. 1880년에 정식 개항한 원산은 일제강점기 때에 명태의 중계무역과 콩 수출항으로 유명한 곳인데, 러시아식 명칭으로는 ‘포트 라자레프(Port Lazarev)’이라 불렸다. 그다음은 재일동포 북송선에 관한 이야기다. 1959년 12월 14일 일본 니가타항에서 재일동포 975명이 옛 소련의 군함을 개조한 수송선 쿠리리온호와 토보르스크호 2대의 북송선을 타고 청진항에 도착했다. 그 후 1971년부터 만경봉호를 통해 니가타〜원산 노선의 북송선은 198...
2019-12-30
북한의 현존사찰 16-강원도 보현사
보현사와 영추암 오늘날 북녘 사찰에는 일주문이 없다. 사찰 입구에 서 있던 일주문은 1951~52년 사이에 방화나 폭격으로 소실됐다. 금강산의 표훈사와 신계사, 정방산 성불사 등에도 없다. 현재, 기존의 건물에 이름을 붙여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흔히 일주문에는 문짝이 없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여닫는 것은 오직 이 문에 들어선 자만의 몫이다. 너와 나, 주체와 객체, 차안과 피안의 구분이 없는 세계로의 귀환이다. 그래서 일주문은 다르게 불이문이라 부른다. 두 가지이면서도 하나인 정신과 마음의 경계선이다. 언뜻 보기에도 2개 또는 4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일주문은 상징적으로 기둥을 하나 세웠다고 하여 일주문이라 일컫는다. 이 문을 통과하면서 속세와 부처님의 세계를 드나드는 것으로 사찰의 첫 관문이다. 옛 일주문에는 서산대사가 지은《선가귀감》에 나오는 “거룩한 빛 어둡지 않아 만고에 환하구나. 이 문 안에 들...
2019-12-16
북한의 현존사찰 15- 강원도 석왕사 (下)
석왕사와 보문암 조선시대의 사찰은 그 연원과 상관없이 왕조의 필요에 따라 능침 또는 봉릉사찰로 지정됐다. 1725년의 <승정원일기>에는 “함경도 안변의 지릉(智陵)에 대한 ‘지사승(持寺僧)’을 두었다”라고 했다. 오늘날 강원도 안변군 서곡면 능리에 있는 지릉은 조선의 추존왕 익조 이행리(李行里)의 능이다.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인데, 개국 직후 1392년 음력 10월 28일에는 능지기 권무 2명과 수릉호를 몇 호 두고, 재궁도 세웠다. 1725년 <비변사등록>에 보면, “지릉에는 종7품의 직장 1명과 종9품의 참봉 1명을 두었는데, 그 아래에 석왕사의 승려 3명을 사환으로 두고, 그 이름을 지사승”이라고 했다. 그 당시 왕조의 능에 대한 규범은 봉래 양사언의 이야기로도 충분하다. 1577년 안변 부사로 부임한 봉래 양사언은 1581년 지릉의 잔디를 태운 단순한 화재가 빌미가 되어 황해도로 유배...
2019-11-25
북한의 현존사찰 14-강원도 석왕사(上)
왕의 탄생은 한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다. 그 나라의 흥망성쇠를 손에 쥐고 있는 단 한 사람,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지만 언제나 홀로 외로운 일생을 살았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첫걸음이 강원도 석왕사에서 시작됐다. 왕은 하늘의 명을 받는 초월적 존재로서 그 자체가 상징이었다. 왕의 신성한 지위와 존엄을 위해 여러 가지 상징적 요소를 만들어 냈다. 왕을 권위를 세우기 위한 작업은 먼저 설봉산 석왕사에서 탄생했다. 이른바 불전(佛傳)에 의한 형태로 널리 유포되거나 문학 작품화되었다. 가장 확실한 기록은 16세기 중엽에 서산대사가 지은《설봉산석왕사기》이다. 여기에는 “태조가 잠저에 있을 때 설봉산(雪峯山)의 토굴에 있던 무학을 찾아가 물었다. 꿈에 허물어진 집에 들어가 서까래 3개를 지고 나왔습니다. 또 꿈에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어졌습니다. 이것은 무슨 징조입니까. 무학이 태조에게 축하하고 대답했다. 그것은 모두 장차 군왕이 될 꿈입니다. 보통 꿈이 아닙니다. 서...
2019-11-11
북한의 현존사찰13-강원도 신계사 (下)
외금강 신계사 계곡을 따라 바다 해룡들이 외금강 구룡연과 해금강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 징표는 동해에서 구룡연까지 40리 구간으로 이어진 용오름길, 폭 20~30cm의 까만색 용띠를 통해 전한다. 구룡연 아래쪽 계곡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용띠는 용이 지나간 자국처럼, 계곡과 물속에 용과 뱀처럼 구불구불 기다랗게 이어진 검은색 바윗줄이다. 주변의 하얀 바위와 대비되어 더욱 선명하지만, 물보라가 칠 때 시야를 흐려 잘 볼 수가 없다. 산속의 수행자들이 “신심이 깊은 불자, 마음이 청정한 사람에게만 보인다”고 말할 정도다. 이와 비슷한 곳은 강원도 동해시의 두타산 용추폭포와 삼화사 무릉계곡에 나 있는 용띠, 용오름길과도 아주 흡사하다. 신계사 앞을 흐르는 신계천은 북쪽으로 역류하지만, 용이 비천하는 외금강의 구룡연, 금강의 아버지인 만물초, 신선들이 살았던 삼일포, 금강산을 잉태한 해금강을 잇는 탯줄과도 같은 존재이다. 생명의 신진대사를 일...
2019-10-28
북한의 현존사찰 12-강원도 신계사(中)
외금강산 구역은 북한 최초의 관광특구로 지정되고, 1998년 11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측 주민들에게 개방된 관광지다. 북측이 2002년 10월 23일 금강산 일대를 국제적인 관광지역으로 규정하는 정령을 발표한 뒤, 같은 해 11월 25일 ‘금강산관광지구법’이 명문화됐다. 현대아산은 2052년까지 50년간 이용할 수 있는 금강산관광특구의 토지 이용권을 통해 관광을 진행하다가 2008년 7월 11일 남측관광객 박씨의 피격사건으로 금강산관광이 중단됐다. 2010년 4월 금강산지구 내의 남측 시설 및 재산을 몰수하고 체류 인원의 전원 추방으로 중단됐다. 2011년 4월에는 현대아산의 독점사업권을 취소한 데 이어, 5월 ‘금강산 국제관광특구법’을 채택하여 남측의 금강산관광 참여를 배제하고, 2011년 11월 4일 중국을 통한 금강산 국제관광이 시작, 중단됐다가 2019년 7월 15일부터 다시 개시됐다. 금강산관광은 그곳의 탄생과 ...
2019-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