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한국의 육자진언

금강산 유점사 동종
금강산 유점사는 신라시대 53불의 연기와 관련된 창건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사찰이다. 고려시대 들어와 크게 중창되었으며, 조선초기에는 세조가 왔다가 중창을 명하여 대찰이 되었다. 조선후기에도 유력한 고승들이 주석하면서 불교계의 중심적인 사찰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동종은 천판 한가운데에는 쌍룡으로 용뉴(범종의 가장 위쪽에 있는 용의 모습을 한 고리)를 구비하였고, 종신 상부에 범자 진언을 새겼다. 그리고 종신 하부에는 구름과 용을 새겨 왕실의 후원으로 조성되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 동종은 명문은 없지만 조선초기에 조성된 동종들과 양식적으로 강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으며, 범자 진언도 유려한 실담체로 양각되어 있어 상당히 우수한 장인에 의하여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22-02-25
남양주 봉선사 동종
이 동종이 봉안되어 있는 남양주 봉선사는 조선 예종이 선왕이었던 세조의 위업을 기리고,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광릉의 원찰로 삼았다. 1469년 7월에 세조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정희왕후의 명으로 동종을 주조하였다고 한다. 이 동종은 명문에 의하면 낙산사 동종보다 3개월 후에 조성되었으며, 종명은 강희맹이 짓고, 정란종이 글을 썼다. 그런데 ‘예종실록’에 의하면 봉선사 동종은 실제로 1469년 8월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 동종은 크고 웅장하여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종으로 종신 상부에 전형적인 실담체로 파지옥진언과 육자진언이 새겨져 있다.
2022-01-27
남양주 수종사 동종
이 동종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원래는 남양주 수종사에 봉안되어 있었다. 남양주 수종사 동종은 정교하고 깔끔한 인상을 주고 있어 우수한 주조 기법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현재의 보존 상태도 상당히 양호한 편이다. 동종의 하대는 파도문양이 표현되었고, 종신 하부에는 연화문이 장식된 당좌가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종신 상부에는 범자 진언이 상당히 높게 양각되어 있다. 또한 상대에는 여의두문 형태의 문양이 원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중첩된 화형 문양이 입상형으로 표현되었다. 명문은 ‘성화오년칠월일 수종사소종주성 시주수빈한씨 정업원주사리씨(成化五年七月日 水鐘寺小鐘鑄成 施主粹嬪韓氏 浄業院住寺李氏)’이며, 종신 상부에는 전형적인 실담체로 육자진언이 2번 반복되어 새겨져 있다.
2022-01-10
양양 낙산사 동종
조선 세조는 1466년 금강산 순행을 다녀온 직후인 1467년 2월 학조를 금강산 유점사에 보내 중창케 하였으며, 1468년에는 학열이 낙산사를 영조하고, 학조는 유점사를 수축하였다고 한다. 양양 낙산사 동종은 조선 예종이 국왕으로 즉위한 직후 부왕이었던 세조의 서원을 추념하고자 1469년 4월에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낙산사 동종은 조선 초기 조성된 대표적인 동종으로 전해지고 있었는데, 2005년 낙산사 일대의 대형 화재로 불에 타 소실되었다. 이 동종은 종신 상부 표면에 전형적인 실담체를 활용하여 육자진언을 새겨 넣었다.
2021-11-30
개성 연복사 동종(1346년)
이 동종은 고려시대 원나라의 불교미술의 영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미술품이기도 하다. 연복사 동종은 현재 북한 개성시의 남대문 누각에 걸려 있는데, 종신 하부에 이곡이 찬하고 성사달이 쓴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명문에 의하면, 원나라의 대장이 고려에 들어와 금강산에서 종을 조성한 후, 귀국하기 전에 1346년 충목왕과 덕령공주의 요청에 의해 종을 주조하여 개성 연복사에 걸었다고 한다. 이후 1563년(명종 18) 개성 연복사가 소실되자 개성의 남대문 문루로 옮겨 걸었다고 한다. 연복사 동종은 랸차체에 가까운 티베트 문자로 상대에는 육자진언, 종신의 가운데에는 금강계 오불진언과 불정존승다라니 등이 함께 새겨져 있다.
2021-10-27
청자상감 접시
이 청자상감 접시는 제기로 활용하기 위하여 13~14세기에 제작된 최고급 청자이다. 이 청자는 하부에 높은 받침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무언가를 담을 수 있도록 원형으로 하여 접시를 안정감 있게 제작하였다. 청자는 많이 파손된 것을 복원한 것이지만 접시 상부 안쪽 면에 범자 진언을 새긴 상태는 완연하게 남아있다. 접시 안쪽 면 한가운데에 2조의 원형문을 마련하여 그 안에 ‘raṃ’자를 새기고, 그 외곽에 1조로 표현한 작은 원형문 6개를 마련하여 각 1자씩 새겨 넣었다. 그런데 ‘oṃ’자를 중심으로 순서대로 ‘ma ṇi pa dme’를 새기고, 마지막은 ‘hūṃ’자가 아닌 다른 범자를 새겼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접시 상부 안쪽 면에 정법계진언과 육자진언을 함께 새겨 넣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청자상감 접시는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021-09-28
청자상감 접시
이 청자상감 접시는 상태가 완전하며, 13세기에 제작된 최고급 청자이다. 이 청자는 하부에 받침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무언가를 담을 수 있도록 원형으로 하여 접시를 안정감 있게 제작하였다. 접시 상부의 안쪽 면에 범어로 진언 다라니를 새겼는데, 외곽에는 다라니를 새기고 그 안쪽으로 2중의 원형문을 마련해 그 안에 육자진언과 정법계진언을 자륜형으로 새겨 넣었다.
2021-08-27
청자상감 접시편
이 청자 상감편은 13세기에 제작된 상당히 우수한 최고급 청자로 강진 사당리 23호 요지에서 출토되었다. 이 청자편은 접시의 일부분으로 하부에 받침대가 있고, 상부 안쪽 면에 범어로 진언 다라니를 새겨 넣었다. 현재 깨진 부분이 많아 어떤 진언 다라니를 새겼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한가운데 2중으로 원형문을 마련하여 그 안쪽에 새긴 진언은 육자진언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청자상감 접시편은 강진 고려청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021-07-29
청자상감편
이 청자편은 제작 기술이 상당히 우수한 고급 청자로 상감청자의 전성기였던 12-13세기에 강진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청자의 안쪽 면에 원형문을 새긴 후, 그 안에 범어로 진언을 새겼는데, 한가운데 범어를 중심으로 6자를 자륜형으로 하여 원형으로 배치하였다. 진언은 정법계진언과 육자진언을 새겨 넣었다. 현재 이 청자상감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021-06-22
대전 월드컵경기장 부지 고분 출토 다라니
대전 월드컵경기장 부지 무연고묘에서는 목판으로 인쇄된 다라니가 출토되었다. 다라니는 시신을 감싸고 있었던 저고리 안에서 출토되었다. 다라니는 크게 2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육자진언과 함께 호부가 좌우로 나란히 새겨졌으며, 하단에는 만다라와 불정심인 형상의 도상이 상하로 배치되었다. 호부 아래에는 부처를 보고 정각을 이루거나 죄를 멸하며, 지옥이 아닌 불국토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염원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불교도들을 중심으로 불교적인 세계관과 사후관에 기초하여 죽은 사람의 무덤 안에 다라니를 매장하는 풍습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조선 세종대와 세조대를 전후한 15세기 불전간행사업이 활발해지고 밀교 관련 경전이 보급되면서 진언 다라니에 대한 신앙이 높아지고, 그러한 것들을 일종의 부적과 같은 존재로 인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조선 15-16세기 대에 일시적으로 불교가 크게 발흥하면서 불교를 통한 기복신앙이 확대되었으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 밀교의 진언 다라니...
2021-05-25
음성 정담 부부묘 목관 출토 판본
음성 정담 부부묘의 주인공인 정담의 사망 년대와 무덤의 조성 시기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시신의 상태와 출토 복식 등으로 보아 16세기 전반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고분은 사신도 등이 새겨져 있어 도교적인 요소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적 유교사관이 널리 성행하였고, 주자가례에 의한 고분 조성이 일반화되었던 시대적 환경 속에서도 정담 부부묘는 불교와 도교가 습합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보기 드문 사례에 해당된다. 이 고분은 시신을 안장했던 목관 안쪽 면에 다라니, 사신도, 비천상 등을 낱장으로 인쇄한 판화가 확인되었다. 이중에서 다라니(23.5×45cm)는 목관 안쪽면의 한 면마다 1장씩 인쇄한 판화를 3면에 부착하였다. 인쇄된 다라니는 오른쪽에 불정심인을 새겼으며, 가운데에는 불정심인 형상을 모방한 만다라를 배치하였고, 왼쪽 상부에는 육자진언을 새기고, 그 아래쪽에는 호부를 새겼다. 호부 아래에는 사각형으로 구획하여 ‘성정각 묘시인당 득견불’, ‘정토...
2021-04-09
순창 운림리 농소고분 출토 목관
순창 운림리 농소고분은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운림리 산12-2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데, 오래전부터 왕씨묘 또는 王 무덤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이 고분은 발굴 조사 결과 사각형 묘역 시설과 지하 토광 안에 목관 및 목곽을 갖추고, 지상에 봉분을 쌓은 구조로 확인되었다. 벽감에서는 청동합을 비롯하여 숟가락과 젓가락 등이 출토되었다. 고분 주인공은 알 수 없지만 목관 표면에 범자 진언이 가득 새겨져 있다. 진언은 육자진언과 파지옥진언이 반복 표현되었는데, 두 진언이 함께 새겨진 사례는 조선시대 동종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범자체는 대부분 실담(Siddham)체를 사용했는데, 일부 랸차(Laῇ-tsha)체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목관에 진언을 새긴 것은 주인공의 사후 추복과 극락왕생을 염원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2021-03-23
화성 출토 양택춘 묘지
양택춘(1172~1254년)은 신라 계림출신으로 원래의 성은 김씨였는데, 나중에 대방군으로 이주하여 양씨로 성을 바꾸었다. 고려시대 최이는 강화도에 선원사를 창건하고 당대의 뛰어난 승려들로 하여금 모임을 주관하도록 했는데, 양택춘의 큰 아들로 승려였던 원오국사 천영(속명 안기)이 이를 주도하였다. 이후 양택춘은 아들의 후광으로 70세에 호부원외랑이 되었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1254년 83세로 사망하였다. 그는 처음 김수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두 아들 모두 승려가 되었다. 이처럼 양택춘은 두 아들이 승려가 될 만큼 불교와 인연이 깊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묘지명에도 여러 진언이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묘지명은 김구가 지었다. 진언은 묘지명 뒷면에 세로로 새겼는데, 먼저 범어로 진언을 새기고, 그 뒤에 진언명을 표기하였다. 진언은 상품상생진언-육자대명왕진언-보루각진언-결정왕생정토주 순으로 새겼다. 양택춘 묘지명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021-03-08
서울 조계사 7층 사리탑
서울 조계사는 오늘날 대한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인데, 뒤편에 1기의 사리탑이 건립되어 있다. 이 사리탑은 태국왕실에서 모시고 있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스리랑카 달마파라스님이 하사받아 호신용으로 모시고 다니다가 한국에 왔을 때 전해주어 佛舍利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0年 경호스님의 주선으로 건립되었으며, 2009년 새로운 사리탑이 건립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사리탑의 기단부 면석부에 육자진언이 새겨져 있어, 당시 육자진언 신앙이 성행하고 있었으며, 다양하게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21-02-16
고성 건봉사 치아사리탑
고성 건봉사는 신라시대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 중창되면서 꾸준하게 법등을 이었다. 특히 조선후기 사명대사 등 유력한 승려들이 머물면서 불교계의 중심적인 사찰이 되었으며, 그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많은 유적 유물들이 남아있다. 이 중에는 사명대사 유정이 1605년 일본에서 되찾아온 12과의 불사리를 봉안한 불탑이 1724년 건립되었다. 관련 석비는 1726년 6월 건립되었다. 이 사리탑의 기단부 중대석 각 면에 1자씩 범어를 양각하였는데, 뒷면 가운데에는 만자를 새기고 나머지 면에 총 7자의 범어를 새겨 넣었다. 육자진언도 간략화시켜 새긴 것으로 보인다.
2021-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