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만다라

올해도 그 꽃이…
천지간에 화사한 봄꽃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서로 '나 좀 보아달라'는 듯이. 그에 뒤질세라 솜털 뽀얗게 뒤집어 쓴 잎들 또한 뾰족뾰족 새순을 밀어 올리고 있다. 추운 겨울, 그들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다가 여기 다시 어떤 인연으로 왔을까? 빼꼼이 내미는 그 많은 얼굴들을 바라보면 생명에 대한 경외감과 신비감이 솟구친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를 보듬는 손길처럼 온종일 가슴이 두근거린다. 우리 집에는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지내온 꽃들이 많다. 수십 개의 분(盆)중에서도 유난히 아릿한 추억이 서린 꽃들이 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곡'(石斛)과 '천사의 춤'이 바로 그것이다. 석곡은 난초과의 하나로 주로 바위나 고목에 붙어산다. 보통 5∼*월경에 흰 꽃을 피우는 것도 있으나, 이맘때쯤 연분홍이나 보라색 꽃을 피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천사의 춤'이라는 일종의 양란이다. 샛노란 바탕에 점점이...
2003-03-18 09:36:58
그리운 황악산
황악산은 내 고향 김천을 상징하는 명산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봄가을로 소풍가서 만났던 황악산은 내 이런 꿈을 키워주던 황홀한 요람이었다. 내가 여덟 살이 되도록 아우를 보지 못하자 어머니는 황악산 직지사에 가서 생남 불공을 드리곤 했다. 어느 봄날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황악산을 오르면서 "남환아, 너 이 다음에 커서 저 산만큼 큰 사람이 돼야재" 하시던 그 말씀이 지금도 먼 기억 속에 가물거린다. 그런데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 황악산은 내 가슴속에 들어와 푸른 희망으로 자리잡았다. 가만히 생각하면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시를 습작하게 된 것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 때문이었다. 서른 여덟 살에 요절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길이 없어 홀로 뒷산에 올라 뽑아도 뽑아도 풀잎처럼 돋아나는 슬픔을 황악산 쪽 하늘을 향해 뿌리곤 했었다. 그런가 하면 여고 시절 나를 포함해서 세 명의 문학소녀가 있었는데 우리는 시도 쓰고 소설을 구상한답시고 30리도 넘는...
2003-03-18 09:36:35
겨울나무의 미학
일년 사계절 중에서 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서슴없이 겨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계절마다 변신하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 살면서 우리 인간은 철들어가며 성숙하기 마련일 테지만 겨울나무만큼이나 나에게 큰 스승도 없을 것 같다. 나는 요 몇 년 동안 겨울만 되면 거리에 늘어선 가로수를 눈여겨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봄이면 싹을 틔우고 여름에는 푸른 젊음을 만끽하며 가을이면 무수한 열매들을 땅으로 되돌리는 나무들도 거룩하지만, 가진 것 죄다 버리고 허공에 내던진 정갈한 알몸뚱이의 겨울나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빈손 빈 마음의 겨울나무, 그 차디찬 고독이 일러주는 무언의 메시지가 바람을 타고 가슴을 파고든다. 무거운 영광도 화려한 젊음도 훌훌 떨어버린 겨울나무의 깨끗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옛날 눈 속에 꿇어앉아 계도(戒刀)로 왼팔을 잘라 달마대사에게 바치고 구도(求道)의 붉은 피를 뿌렸던 혜가 선사를 연상하게 된다. 워낙 게으른 탓도 있고 또 무릎 관...
2003-03-18 09:36:13
어떤 편지
며칠 전 한 통의 두툼한 편지를 받았다. 오랜 전 이웃에 살면서 알게 되었다. 그 후 지방으로 이사를 가고, 이래저래 소식 끊어진 지 꽤 오랜만에 받아보는 편지였다. 간혹 그림 전시전 소식을 보내오긴 했어도 정작 한번도 가 보지는 못했다. 깨알 만한 글씨로 빼곡이 쓴, 그것도 연필로 꾹꾹 눌려가며 쓴 편지였다. 그 작은 글씨로 A4지 일곱 장을 썼으니 오죽 많은 사연이 깃들어 있었겠는가. 그 전부터도 얼핏 내비치는 이야기 속에는 삶이 그리 평탄한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 들긴 했었다. 요즘에야 흔한 일이지만 20여 년 전, 여섯 살 연하인 지금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의 힘은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남편의 외도로 집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바뀌기 시작했다. 오직 그림에만 매달리며, 더러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점점 더 원숙미를 더해 가는 그림에 비례해 몸무게 또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몇 년을 그런 악순환의 되풀이 속에 몸과 마음은...
2003-03-18 09:36:08
인간성에 물주는 사람
우리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에 그 고비를 호되게 극복해 가고 있다. 무엇보다 경제우선의 삶을 영위하다 보니 정신이나 마음엔 틈새가 비좁아져 사람다움의 윤기를 잃어가게 되었다. 결국 세상이 삭막해졌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살맛이 안 나고 상대가 왠지 의심스럽고 신뢰감이 떨어지게 된다. 그러다 보니 불신의 풍조가 도처에 산재하게 되어 매사에 신중을 기하지만 결과에 늘 찜찜해 하는 것 같다. 이 모두가 인간성의 상실에서 오는 일이다. 그러나 가만히 삶을 다시 되짚어 보면 인간성의 박토에 거름을 주고 물을 주는 이가 많다고 본다. 이런 것 때문에 세상은 살맛이 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작은 선(善)을 행하는 사람이 그들이다. 이것도 의식적이기 보다 자연발생적이다. 버스나 전철에서 노인이나 장애자, 아기 업은 부녀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가 그들이다. 보기 흉한 쓰레기를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는 어린이와 젊은이도 만난다. 또 학생이나 젊은이에게 길을 물었을 때, 손으로 가리키다 말고...
2003-03-18 09:3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