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만다라

행복한 하루
지난 일요일은 남양주에 있는 어느 절을 다녀왔다. 비 온 뒤라 그런지 말갛게 씻긴 산과 들이 풀어놓은 색감들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절에 도착해 늦은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왔다. 절 주변에는 온갖 유실수들이 주렁주렁 열매를 매달고 뜨거운 여름햇살을 견디고 있었다. 빨갛게 익은 보리수 열매며, 살구, 복숭아, 포도, 매실… 적어도 나에게는 어느 것 한 가지도 신기(?)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삭막한 도심에서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상황과 맞닥트린 탓인지 같이 간 친구도 마냥 감탄사를 연발해대는 것이었다. 농익어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 보리수 열매로 나무 주변은 불긋불긋한 수를 놓고 있었다. 한 움큼을 따서 입안에 넣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한껏 고여 든 입 속에는 내내 미묘한 향이 감돌았다. 한 동안을 그 열매에 취해 있다 이번에는 텃밭으로 나갔다. 여기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감동의 물결을 만났다. 풀 한 포기 없이 말갛게 정돈된 밭에서는 갖은 채소들(고추, 아욱, 상추, 열무, 쑥갓…...
2003-03-18 09:39:25
청령포에서
며칠 전 충북 제천에 살고 있는 사촌 내외의 안내로 영월의 명소인 청령포를 찾아 단종의 애달픈 유적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육칠 년쯤 되었을까, 배낭 하나 달랑 메고 혼자서 청령포 나룻배를 탔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내가 어렸을 때 김천시에는 극장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날 밤 어머니를 따라 악극단 구경을 갔었다. 그 때 '단종 애사'란 연극을 보면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던 것이 바로 엊그제 일같이 생생하다. 극중 어린 단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저 새 소리도 마지막, 저 뻐꾸기 소리도 마지막…"하며 절규하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우리 일행은 배를 내려 자갈밭을 지나 청령포 솔밭으로 들어섰다. 그 옛날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귀양 온 단종(노산군)이 두고 온 비(妃)가 그리워 어린 소나무 가지에 올라가 한양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지었다는 그 나무가 600년을 살며 역사를 보고 들었다고 하여 '관음송'이라는 이름을 얻고 거목이 되어 있다. 그 관음송은...
2003-03-18 09:39:07
개펄 체험
오랫만에 강화의 갯말 앞에 펼쳐진 개펄에 가 보았다. 물이 다 빠져나간 개펄의 크기는 여의도의 두 배쯤 되어 보였다. 연안의 가장자리엔 소금이 말라붙어 하얀 띠가 둘려 있었다. 마치 경기장의 룰을 표시한 선처럼 보였다. 그렇다. 환경보호의 구역을 표시한 경계선이자 또 하나의 청정지역의 표시이기도 했다. 또한 연안과의 접경지역엔 난쟁이 갈대꽃이 아직도 피어 있었다. 소금기 때문인지 크게 자라지는 못한 것 같았다. 개펄을 밟아 보았다. 개펄은 넓고 펑퍼짐한 큰 둔덕이었다. 물이 들어오고 빠지는 작은 계곡의 물길이 있었다. 그런데 그 물길의 물가엔 망둥어와 그 새끼들이 톡톡 튀며 잽싸게 숨는 것이었다. 생명의 도약에 한없이 싱그러운 마음을 억누르며 신기해했다. 그러나 어디 그 뿐이겠는가. 그 너른 개펄 전체엔 빠꼼빠꼼 수 없는 숨통구멍들이 있지 않는가. 숨구멍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어느 것은 게가 사는 집, 맛살 조개가 사는 집, 딴은 갯지렁이가 사는 집이 각각 달랐다. 그곳에서 그걸 잡...
2003-03-18 09:38:47
사람의 향기
어떤 식물이나 꽃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향기를 지니고 있다. 그 향기들은 세상에 널리 퍼져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도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 이런 향기는 식물이나 꽃들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에게도 그들만의 향기가 있다. 한 사람이 가진 작은 향기가 온 세상에 퍼져 은은한 감동을 주는가 하면, 온통 이상한 냄새로 전체를 오염시키는 사람도 있다. 온 나라가 연신 무슨무슨 게이트로 소모전을 벌이더니 이제는 한 위정자의 아들들 문제로 언론들은 들끓고 있다. 거기에다 더 가관인 것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몇몇의 또 다른 얼굴들이다. 권력이라는 주변에 부나비처럼 몰려들어 온갖 비리와 협잡으로 사회 전체의 균형을 깨트리고 있는 그들. 지금 우리는 방향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날마다의 삶이 한 점 불빛도 보이지 않는, 마치 망망대해에서 표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등대 없는 바다를 상상 할 수 없듯이, 희망 없는 나날 속에서 세상을 살아...
2003-03-18 09:38:27
훨훨 날아가소서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벌써 두 번째의 기신(忌晨)을 맞았다. 나는 2년 동안 단 하루도 어머니 생각을 놓지 못했었다. 어머니의 영정 앞에 생전의 체취가 묻어 있는 염주와 천수경 그리고 반지며 수첩 등을 놓아두고 조석으로 그 앞에서 향을 피우며 북받치는 울음을 꾹꾹 눌러 삼켰다. 친구들은 하기 좋은 말로 여든 아홉이면 천수를 다하고 가셨는데 왜 그렇게도 슬퍼하느냐며 위로해 주지만 그 위로의 말이 도리어 내 아픔을 건드려 놓곤 했었다. 서른 셋의 젊은 나이에 지아비의 혼백을 안고 열세 살의 한 점 혈육을 데리고 고향을 뒤로했던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우리 모녀는 55년 간의 긴 세월을 마주잡고 갖은 애환을 함께 누볐다. 이웃의 귀감이 될 만큼 부지런했던 어머니는 그 어려웠던 6·25 사변을 겪으면서도 억척같이 돈을 벌어 나를 대학까지 보내 주셨다. 병약했던 자식을 위해 자신의 청춘을 버렸던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이 지금도 뼈를 저미는 애통으로 오장을 녹여 내린다. 며칠 전에 내가 자주 찾...
2003-03-18 09:37:56
환경보호와 곤장 백대
요즘 황사현상으로 자연의 재앙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눈으로 보게 하고 있다. 각종 질병을 유발하고 어린이나 노약자에겐 치명적인 해독을 끼친다고 했다. 중국정부에서도 막대한 돈을 투입해 제방도 쌓고 나무도 심어보지만 지역이 워낙 방대해서 그 효과는 미미하다는 것이다. 특히 내심 겁을 먹고 있는 것은 앞으로 몇 년 뒤에 있을 올림픽행사를 무난히 치를 수 있을지가 심히 우려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 시기에 황사가 일어나 경기장을 스치거나 덮친다면 올림픽도 치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그 너른 지역을 비닐로 죄다 덮을 수도 없다. 다만 하늘에 맡기는 도리 밖에는 없으니 이거야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세계의 사막화'가 가속화되는 시점에서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필자는 얼마 전 강화도의 역사박물관에 들렀다. 수난의 섬임을 재확인했으나 그보다 박물관 앞뜰에 모아 놓은 비석 중 유독 하나에 눈길이 머물렀다. 요즘으로 말하면 일종의 경고문 표식...
2003-03-18 09:37:20
올해도 그 꽃이…
천지간에 화사한 봄꽃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서로 '나 좀 보아달라'는 듯이. 그에 뒤질세라 솜털 뽀얗게 뒤집어 쓴 잎들 또한 뾰족뾰족 새순을 밀어 올리고 있다. 추운 겨울, 그들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다가 여기 다시 어떤 인연으로 왔을까? 빼꼼이 내미는 그 많은 얼굴들을 바라보면 생명에 대한 경외감과 신비감이 솟구친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를 보듬는 손길처럼 온종일 가슴이 두근거린다. 우리 집에는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지내온 꽃들이 많다. 수십 개의 분(盆)중에서도 유난히 아릿한 추억이 서린 꽃들이 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곡'(石斛)과 '천사의 춤'이 바로 그것이다. 석곡은 난초과의 하나로 주로 바위나 고목에 붙어산다. 보통 5∼*월경에 흰 꽃을 피우는 것도 있으나, 이맘때쯤 연분홍이나 보라색 꽃을 피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천사의 춤'이라는 일종의 양란이다. 샛노란 바탕에 점점이...
2003-03-18 09:36:58
그리운 황악산
황악산은 내 고향 김천을 상징하는 명산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봄가을로 소풍가서 만났던 황악산은 내 이런 꿈을 키워주던 황홀한 요람이었다. 내가 여덟 살이 되도록 아우를 보지 못하자 어머니는 황악산 직지사에 가서 생남 불공을 드리곤 했다. 어느 봄날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황악산을 오르면서 "남환아, 너 이 다음에 커서 저 산만큼 큰 사람이 돼야재" 하시던 그 말씀이 지금도 먼 기억 속에 가물거린다. 그런데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 황악산은 내 가슴속에 들어와 푸른 희망으로 자리잡았다. 가만히 생각하면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시를 습작하게 된 것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 때문이었다. 서른 여덟 살에 요절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길이 없어 홀로 뒷산에 올라 뽑아도 뽑아도 풀잎처럼 돋아나는 슬픔을 황악산 쪽 하늘을 향해 뿌리곤 했었다. 그런가 하면 여고 시절 나를 포함해서 세 명의 문학소녀가 있었는데 우리는 시도 쓰고 소설을 구상한답시고 30리도 넘는...
2003-03-18 09:36:35
겨울나무의 미학
일년 사계절 중에서 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서슴없이 겨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계절마다 변신하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 살면서 우리 인간은 철들어가며 성숙하기 마련일 테지만 겨울나무만큼이나 나에게 큰 스승도 없을 것 같다. 나는 요 몇 년 동안 겨울만 되면 거리에 늘어선 가로수를 눈여겨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봄이면 싹을 틔우고 여름에는 푸른 젊음을 만끽하며 가을이면 무수한 열매들을 땅으로 되돌리는 나무들도 거룩하지만, 가진 것 죄다 버리고 허공에 내던진 정갈한 알몸뚱이의 겨울나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빈손 빈 마음의 겨울나무, 그 차디찬 고독이 일러주는 무언의 메시지가 바람을 타고 가슴을 파고든다. 무거운 영광도 화려한 젊음도 훌훌 떨어버린 겨울나무의 깨끗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옛날 눈 속에 꿇어앉아 계도(戒刀)로 왼팔을 잘라 달마대사에게 바치고 구도(求道)의 붉은 피를 뿌렸던 혜가 선사를 연상하게 된다. 워낙 게으른 탓도 있고 또 무릎 관...
2003-03-18 09:36:13
어떤 편지
며칠 전 한 통의 두툼한 편지를 받았다. 오랜 전 이웃에 살면서 알게 되었다. 그 후 지방으로 이사를 가고, 이래저래 소식 끊어진 지 꽤 오랜만에 받아보는 편지였다. 간혹 그림 전시전 소식을 보내오긴 했어도 정작 한번도 가 보지는 못했다. 깨알 만한 글씨로 빼곡이 쓴, 그것도 연필로 꾹꾹 눌려가며 쓴 편지였다. 그 작은 글씨로 A4지 일곱 장을 썼으니 오죽 많은 사연이 깃들어 있었겠는가. 그 전부터도 얼핏 내비치는 이야기 속에는 삶이 그리 평탄한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 들긴 했었다. 요즘에야 흔한 일이지만 20여 년 전, 여섯 살 연하인 지금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의 힘은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남편의 외도로 집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바뀌기 시작했다. 오직 그림에만 매달리며, 더러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점점 더 원숙미를 더해 가는 그림에 비례해 몸무게 또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몇 년을 그런 악순환의 되풀이 속에 몸과 마음은...
2003-03-18 09:36:08
인간성에 물주는 사람
우리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에 그 고비를 호되게 극복해 가고 있다. 무엇보다 경제우선의 삶을 영위하다 보니 정신이나 마음엔 틈새가 비좁아져 사람다움의 윤기를 잃어가게 되었다. 결국 세상이 삭막해졌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살맛이 안 나고 상대가 왠지 의심스럽고 신뢰감이 떨어지게 된다. 그러다 보니 불신의 풍조가 도처에 산재하게 되어 매사에 신중을 기하지만 결과에 늘 찜찜해 하는 것 같다. 이 모두가 인간성의 상실에서 오는 일이다. 그러나 가만히 삶을 다시 되짚어 보면 인간성의 박토에 거름을 주고 물을 주는 이가 많다고 본다. 이런 것 때문에 세상은 살맛이 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작은 선(善)을 행하는 사람이 그들이다. 이것도 의식적이기 보다 자연발생적이다. 버스나 전철에서 노인이나 장애자, 아기 업은 부녀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가 그들이다. 보기 흉한 쓰레기를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는 어린이와 젊은이도 만난다. 또 학생이나 젊은이에게 길을 물었을 때, 손으로 가리키다 말고...
2003-03-18 09:3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