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진각종의 역사

진각의 세계를 열다
2)교화의 전개와 심인불교(2) 교화단체 참회원의 조직참회원의 교화가 급속히 일어나면서 동시에 참회원 안과 밖에서 여러 가지 난관도 맞았다. 우선 밖의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계산동 교화에서 처음으로 관의 집회 허가를 받았다. 교화의 훼방이 계속되어 참회원을 ‘교화단체참회원’의 이름으로 간부조직과 강령을 마련하여 사회단체로서 경상북도 공보과에 등록하였다(2,8.3). 이러한 사정을 교사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현교지마(顯敎智魔)들의 시기 질투로서 신문 여론을 환기하고 각 기관을 움직여서 담화가 발표되자 경찰은 무장 경관을 동원하여 남산동 도량은 문 닫게 하고 계산동 도량은 허가 기간 만료에 이용하여 허가를 계속하여 주지 않게 훼방하였으므로 교화는 결국 무기 중지되었다. 이로 인하여 선교님과 하영택 외 수명의 간부가 대구서에 야간 호출을 당한 일도 있었다. 교화가 중지되자 신교들의 전부는 각 요로 당국에 진정하였으나 그대로 계속하지 못하고 당시 지사 장인환(長仁煥) 씨 및 경찰서장 ...
2020-08-10
진각의 세계를 열다
(4) 참회원의 개설계전의 교화가 자리를 잡자 교화를 우당에게 물려주고 진기 원년(1947) 9월 25일 양동의 관가정(觀稼亭)으로 교화 장소를 넓혀갔다. 양동은 월성 손 씨의 종가가 있는 마을이다. 관가정은 본래 월성손씨 3세조 손소(孫昭·1433~1484)의 둘째 아들로서 경주 동강서원(東江書院)에 배향된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이 분가하여 살던 사가였다. 사랑채 누마루에 관가정이라는 당호를 붙여 집 전체를 관가정이라 불러왔다. 진선여중 손인수가 1980년대에 손소의 영정을 이곳에 배향하였다. 그런데 교사는 관가정 앞에 송첨(松簷)이라는 명칭을 붙여서 ‘송첨관가정’이라 부르고 있다. 송첨은 손소의 아호로서 그가 살던 서백당(書百堂·현 월성손씨 종택)의 큰 사랑방의 대들보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교사에 관가정의 명칭 앞에 송첨을 붙여서 송첨관가정이라 서술한 까닭은 알 수 없다. 양동은 월성손씨의 종가뿐만 아니라, 손 씨와 인척 관계에 있는 여강이씨의 종택도 있...
2020-07-28
진각의 세계를 열다
1) 교화의 시작과 참회원 (1) 대종사의 깨달음대종사는 100일 정진 중에 고성염송에서 심상염송(心想念誦)의 이득과정(已得過程)을 거치면서 염송삼매(念誦三昧)를 증득하였다. 진언염송의 수행은 음성염송에서 심송(心誦)으로 수행의 경지가 깊어지면서 심신이 정화되고 삼마지의 상태에 이르게 한다. 삼마지의 경지는 늘 지금 여기의 청정한 마음에 머물러서 몸과 마음, 그리고 나와 세계가 일여(一如)한 경지를 내관(內觀)하게 한다. 대종사는 먼저 육자진언의 염송수행으로 심신이 상연하고 신병이 돈유되는 불가사의한 경험을 하였다. 그리고 심일경(心一境)의 삼마지를 체험하고 법계진리를 내관하는 경지를 체득하였다. 나아가 법계 천지의 은혜가 지중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육자진언의 묘리를 증득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에 대하여 대종사의 비문은 “5월 16일 새벽 심신이 상연(爽然)하여지고 문득 동천에 솟는 태양을 보매 불은의 무변함과 천지은혜 지중함을 몸에 사무치게 느끼신 후 ...
2020-07-13
진각의 세계를 열다
(6) 득병의 인생계기대종사는 귀향하던 중 대구에서 한 달여간 머물며 그간의 심경을 정리하였다. 그때 아들(서주 손제석)이 경북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설(1946년 2월 2일)이 다가오자 포항으로 돌아왔다. 설을 맞아 고향에 돌아오자 모친이 생식의 중단을 권유하였다. 생식을 2년 가까이 하면서 수행정진과 사회활동을 병행하였다. 효순심이 강한 대종사는 모친의 권유에 수순하고 화식으로 전환하였다. 그런데 설을 지내고 득병을 하였다. 득병의 직접 원인은 화식 전환의 부작용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생식과 수행정진, 그리고 사회활동 특히 상경의 생활 등으로 심신의 무리를 느끼고 있었다. 또한 사업과 김두하의 재산관리, 그리고 삼 사건 등으로 심려가 깊었다. 그런데 그 당시 널리 퍼진 전염병 이질이 또한 큰 작용을 하였다. 대종사는 득병의 고통 속에서도 약을 쓰지 않았다. 득병의 치유를 위해 수행정진에 용맹을 더하였다. 약을 쓸 것을 권유하던 모친도 대종사의 불공을 적...
2020-06-22
진각의 세계를 열다
(3) 생식 수행을 시작하다제과 공장 화재 이후 대종사는 또 다른 사업을 구상하였다. 수행정진 중에서도 사업의 큰 가닥은 직접 구상하고 그 후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그것은 광산업이었다. 광산업은 일제가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을 거치면서 시행한 군비증강 정책의 하나였다. 일제가 금광 탐사의 비용을 지원하고 금을 비싸게 사들이자 많은 사람이 광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광산업에 관한 책들이 출판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부추기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산업을 시작한 것은 민족자본의 문제도 있었다. 그 당시 일제는 한반도의 산업을 독점하는 정책을 폈다. 특히 광업은 90% 이상 일본인의 자본이었다. 한민족에 의한 자본을 증대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광산업의 비약적인 진흥은 일제의 획책인 것을 알고 나서 광산업을 불시에 중지하였다. 그즈음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교화의 문을 연후에도 가끔 주위 사람들...
2020-06-08
진각의 세계를 열다
(4)사회생활을 체험하다긴 여행에서 돌아온 청년 덕상은 우선 면사무소에서 일을 하였다. 일본 경험과 한학의 지식이 면사무소 근무를 가능하게 하였다. 면사무소 근무는 2년 정도 하고 그만두었다. 25세(1926)에 규상(圭祥)으로 개명하고 도동으로 이사하여 학용품 가게를 열었다. 장남(창수)이 태어나자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 학용품 가게는 기대 이상으로 발전하여 포목·잡화·미싱 등으로 넓혀갔다. 이렇게 해서 청년 규상은 사업가로 알려졌다. 이즈음 포항의 사업가들이 울릉도를 자주 왕래하였다. 사업가 규상은 이들과 거래를 하였다. 모두가 대종사의 성실성과 사업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거래를 자청하였다. 특히 그중에 포항의 큰 사업가 김두하(金斗河)가 젊은 사업가 규상의 사업능력을 눈여겨보고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마치 형제처럼 교유하게 되었다. 김두하·김두만·김두수 삼형제는 당시 포항의 경제계에 큰 활약을 하였다. 김두하(1894~1957...
2020-05-25
진각의 세계를 열다
(2) 보통학교에 입학하다울릉도에 근대 교육기관으로서 울릉 공립 보통학교가 설립되자 대종사는 14세(1915)에 입학하였다. 울릉도에 근대 교육기관 설립은 1901년에 시작한다. 1901년 황성신문 2월 27일 자 잡보에 “울릉군수 배계주(裵季周) 씨가 해군인민(該郡人民)의 교육차로 학교를 설시하고 학부에 인허를 청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울릉군수 배계주가 울릉도가 울릉군으로 승격된 것을 계기로 1901년 1월 울릉도에 처음으로 근대학교를 설립하고 학부에 인허를 신청한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그 후 1908년 군수 심능익(沈能益)이 관어학교(觀於學校)를 건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교원은 조현우(趙鉉禹)와 일본인 요시다 히츠지(吉田未藏)의 2인이고, 학생 수는 12~13명이었다. 교과목은 일어·산수·한문 등 서당식으로 수업하고, 수업 연한은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정적 문제로 이듬해 1909년 휴교하였다. 관어학교가 휴교하자 관어학교를 이용하...
2020-05-12
진각의 세계를 열다
1) 탄생의 인연 계기대종사는 1902년 평범한 유교 가문의 장남으로 울릉도에서 탄생하였다. 한방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 손원섭(孫允燮·1884~1927)와 어진 성품의 어머니 김양삼(金良三·1883~1949) 사이의 2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월성 손 씨 21세손이며, 선조는 경주에서 상주, 순흥(順興·안동), 영천, 군위 등을 거처 영일 계전에 정착하였다. 그 후 조부가 울릉도로 이주하였다. 근대 울릉도에 공식적으로 민간인의 거주를 허용한 것은 1883년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자연발생적으로 사람들이 왕래하고 거주하여 나라에서 순찰하고 관리해 왔다. 그리고 1882년 울릉도를 주람순찰(周覽巡察)한 보고서는 함흥사람 사인(士人) 김석규(金錫奎) 등 한국인 14명, 일본인 78명의 거주를 밝혔다. 그 보고에 의해 나라에서 민간인을 모집하여 울릉도에 이주시키는 개척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고종 20(1883)년 본격적인 개...
2020-04-20
진각의 세계를 열다
1) 창교의 의미진각종은 회당대종사(이하 ‘대종사’라 칭함)가 진각을 성취하여 창교한 불교종단이다. 대종사는 불법의 심수인 밀교정신을 자내증(自內證)하고 진각을 이루었다. 나아가 그 자내증의 교설을 종지로 삼아서 교법을 창립하고 진각종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진각종은 대종사의 자증교설을 시대에 맞는 교화이념과 방편으로 펴면서 널리 전하였다.즉, 진각종은 “불법의 심수인 밀교정신을 본지로 하고 밀교의 법맥을 심인으로 전수한 대종사의 자증교설을 종지로 삼아서 교법을 세우고 종문을 열어서 시대에 맞는 교화이념과 방편을 펴는 불교종단”이다.진각종은 창교의 근본취지로서 밀교정신을 본지로 하고 있다. 대종사는 밀교의 가르침을 자내증하고 진각을 얻어서 진각종을 열었다. 그리고 진각종을 일으킨 사실을 창교라고 일컬었다. 창교라는 말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창교에서 ‘교’가 종교를 의미하기도 하고, 또한 교법을 가리키기도 한다. 대종사가 교화를 시작할 즈음 창교의 뜻은 종교의 의미에 무게를 ...
2020-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