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진각종의 역사

진각의 세계를 열다
(4)언도공판과 법난의 종결대종사에 대한 모략중상 사건의 언도 공판은 5회의 공판을 거쳐서 다수의 스승과 신교도가 공청한 가운데 5호 법정에서 개정하고 다음과 같이 무죄의 판결을 하였다(9,12.15). 1.사기문제에 대하여-문교부에 조회한 회답에 의하든지 헌법 기타 증인 진술에 의하든지 심인불교는 정정당당한 불교의 한 혁신 종파로 인정하고 따라서 심인불교에 일체 희사한 것이나 희사받은 것은 사기로 인정하지 않는다. 2.배임 및 업무상 횡령에 대하여-자선사부에의 지출 및 13만 환 가불의 건은 모든 장부가 구비되어 있고 전수·정사회 및 이사회 인회 등 결의를 거쳐 지출한 것임으로 배임 및 업무상 횡령이 아니다. 3.증회 수회에 대하여 문교부 직원에 대하여는-단기 4287년(진기 8년, 서기 1954년) 5월 10일(음 4월 8일) 석존성탄절에 종교적 축하의 의미로서 행사한 것이고 하등 업무상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므로 증회 또는 수회가 성립되지 않는...
2020-12-29
진각의 세계를 열다
4)법난의 발생과 극복 (2) 법난의 전개와 대응이영중의 획책을 순리로 해결하기 위해 재단 이사진이 인책 사직하고 이사를 다시 개선하였으나 이영중의 반대로 본래대로 환원하였다(8,9.30). 결국 당시 인회(印會)의 경리를 맡아서 일하던 김훈(金熏·김병국(金炳國), 법성(法性)) 처무(處務)가 경찰에 구속되자(8,10.5) 신교도 대표로서 하영택, 신홍복(申弘福), 강창호, 김선기(金善基) 정덕대(鄭德在) 등 5인의 명으로 심인불교 모략 중상에 대한 4개 항의 성명서를 각 신문에 발표하였다(8,10.7). 대종사는 일이 진행되는 동안 사건에 대한 내적인 반조와 스스로를 참회하는 말씀을 측근에게 하면서 정진으로 시간을 보냈다. 대종사가 늘 정진을 하고 있어서 경찰이 왔다가 그냥 돌아가기도 하였다. 결국 경찰은 정진 중인 대종사를 연행하려 하자 묵언으로 경찰의 연행에 응하였다. 대종사가 남대구경찰서에 구속되자(8,10.15) 신교도들이 남대구서에 운집하였다. 이...
2020-12-17
진각의 세계를 열다
3)교육사업과 사회참여 활동 (2)자선사부와 직포공장심인중학교의 설립재단으로 직포공장을 설립하기 위해서 종단에 자선사부(慈善事部)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7,9.10). 심인중학교 설립 등 간접 교화를 위해서 교화활동을 이부(理部)와 자선사부로 구분하였다. 교리와 수행을 통한 교화 활동은 근본적인 교화 활동이라는 의미에서 이부, 국가 사회에 참여하고 기여하는 교화 활동은 구체적인 자비의 활동이라는 뜻에서 자선사부라고 하였다. 이부는 심인당의 직접 교화를 말하고 사부는 교육과 복지 나아가 사회참여 활동을 말한다. 서울에 자선사부를 설치하고 자금 25만 환을 찬조하기로 하고, 이부와 자선사부의 자금을 상호 유용하기로 결의하였다(7,12.21). 처음에는 희사금도 이부와 사부의 용도를 달리하여 사용하기로 하였으나, 사부의 자금조달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심인중학교 설립재단인 직포공장 부지를 대구시 비산동심인당 앞 공지로 결정하고(8,3.15), 공장의 설비를 시...
2020-11-30
진각의 세계를 열다
2)교화방편의 증진과 교화역량의 강화(2) 교화역량의 강화교화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자성학교를 개설하였다(7,12.20). 자성학교는 자성일에 어린이 교화를 위한 심공 모임을 가리킨다. 신교도 자녀와 심인당 인근의 어린이를 모아서 교화를 하였다. 개설 당시에는 오후 1~2시 사이에 공부 모임을 가졌으나 상황에 따라서 변경하였다. 교화가 지속적으로 발전하여도 아직 심인불교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높지 않아서 교를 상징하는 교표를 만(卍)자로 변경하였다(8,9.22). 처음교표는 육자(六字)로 하고 다시 불교의 일반에서 사용하는 만자로 변경하여, 남산동, 영등포, 괴동심인당에 시험적으로 건립하였다(9,11.27). 그러나 심인불교의 특수성을 나타내는 데는 적당하지 않아서 심성(心性)의 상징인 일원상(일원(一圓[구(球)]상(相))을 교의 표지(標識)로 정하였다(12,6.30). 이와 더불어 교의 호칭을 교리에 어울리게 재정립하였다(9,2.14). 헌법제정으로 유지재단을 설립하고 심인불교의 ...
2020-11-12
진각의 세계를 열다
1) 진각종의 성립 (3) 종단의 정체성 확립종단은 헌법을 제정하면서 불교의 종파개념을 받아들여 공식 명칭을 대한불교진각종보살회라 확정하고 특히 ‘보살회’라는 용어를 붙였다. ‘대한불교진각종보살회’에서 ‘보살회’는 ‘진각종은 보살회다’라는 의미로서 진각종의 성격을 ‘보살회’로 밝히고 있다. 불교의 교리는 원래 심원광대하여 하나의 문으로 다 나타낼 수 없고 또한 하나의 방편으로 다 교화할 수 없다. 시대에 따라서 다양한 종파가 나누어지고 환경에 맞는 많은 방편이 마련되었다. 그리하여 불교의 분화와 협동이 이루어져서 교화발전이 크게 일어날 수 있다. 그중에서 출가 종파와 재가 종파로 분화하여 교화하면 전통 계승과 시대에 맞는 교화를 원만히 할 수 있다. 따라서 진각종은 ‘보살회’라고 하여 전통적인 출가불교의 일원 통속적인 종파에 대하여, 시대에 맞는 교화방편을 펴는 재가불교의 이원전문적인 종파라는 정체성을 드러내었다. 그래서 비유하면 출가종은 집안의 종손(宗孫)과 같이 전통을 ...
2020-10-27
진각의 세계를 열다
1) 진각종의 성립 (1) 헌법의 제정심인불교참회원은 창교부터 구성원의 의견을 모아서 공의(共議)로 운영하려고 노력하였다. 참회원의 운영과 신교도의 생활에서 공사(公私)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참회원은 교세가 확산되고 규모가 커지면서 행정조직과 교화 활동의 체제를 다시 정비하였다. 헌법을 제정하여 참회원의 체제를 완전히 개정하였다. 헌법 제정 경과문은 헌법 제정의 필요성을 잘 밝히고 있다. “본교는 단기 사이팔십년 시월(?)에 참회원으로 발족하였을 때는 하등의 시행법을 가지지 못하였으나 본교의 발전함에 따라 단기 사이팔일년 팔월 사(?)일 교화단체 참회원으로 본도 공보과에 등록 때는 간부조직과 강령을 세웠고, 단기 사이팔사년 칠월 이십구일 심인불교건국참회원으로 중앙공보처에 등록할 때에는 단원 규약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보살회의 발전하고 있는 범위는 벌써 현용의 단헌 규약으로서는 도저히 적합지 않고 또 그 일부를 개정하여도 적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전부를 개정하...
2020-10-12
진각의 세계를 열다
(2)교화 방안과 교육참회원의 교화 중에는 외마 뿐만 아니라 내마(內魔)도 일어났다. 그것은 교화자와 신교도의 문제였다. 교화자의 자격에 관련하여 교사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아직 자기도 제도 못 한 사람을 중생교화에 지도자로 뽑아서 포교문을 연 까닭으로 더욱 마장이 심했다(2,12.12). 스승 진리가 어두운 까닭이다(3,7.30). 일원주의에 전도한 설법으로 인해서 부득이…휴직하게 하였다(3,12.12). 소실 둔 남편만 무자격한 것을 발견 실행 중에 교도 가운데 허다히 보는 바와 같이 역시 소실 둔 본부인은 자격이 없다는 것이 누구나 다 남편과 가족을 화도 못하는 것은 분명하게 나타나 있음으로 어찌 자기 가족을 제도 못하고 남을 제도하랴. 그러므로 부득이… 자진 사퇴하게 하였다(5,9.15). 가정 외도로서 인법(印法)에 맞지 아니하여 교화에 지장이 막대하므로 정사직을 사면하고…(5,3.30).”교화자의 자격을 인법이라 부르고 인법에 어긋나는 사람은 정사, 전수로서 교화 자...
2020-09-22
진각의 세계를 열다
3)심인불교의 조직과 교화활동 (1)참회원의 조직정비참회원의 교화가 심인공부를 드러내면서 교당의 명칭을 참회원에서 심인당으로 개칭하였다(6,4.8). 따라서 교단의 명칭은 심인불교참회원, 교당의 명칭은 심인당으로 정해졌다. 심인불교참회원의 교화는 활기를 더하여 심인당은 전국으로 확산하여 갔다. 대구 동인동에 심인당을 건축하여 박대준(朴大俊)이 교화하고(6,8.11), 이어서 서울심인당(밀각심인당)의 건축에 착공하여(6,9.29) 다음 해 2월 8일에 준공하고 대종사가 교화를 맡았다(7,2.8). 서울 심인당 건축은 특별하게 진행되었다. 대종사는 북한군이 낙동강을 건너 대구에 진입하기 직전에 피난길을 권유하는 측근에게 “전쟁이 물러가지 내가 물러가나. 가고 싶은 사람만 가라”고 하며 피난을 가는 대신 남산동 참회원에 소재도량을 열어 불공을 하였다. 그리고 휴전이 진행되는 동안 서울에 소재도량을 열어야 전쟁이 끝난다면서 전투 중에 깨어진 벽돌을 주워 모아서 심인...
2020-08-28
진각의 세계를 열다
2)교화의 전개와 심인불교(2) 교화단체 참회원의 조직참회원의 교화가 급속히 일어나면서 동시에 참회원 안과 밖에서 여러 가지 난관도 맞았다. 우선 밖의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계산동 교화에서 처음으로 관의 집회 허가를 받았다. 교화의 훼방이 계속되어 참회원을 ‘교화단체참회원’의 이름으로 간부조직과 강령을 마련하여 사회단체로서 경상북도 공보과에 등록하였다(2,8.3). 이러한 사정을 교사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현교지마(顯敎智魔)들의 시기 질투로서 신문 여론을 환기하고 각 기관을 움직여서 담화가 발표되자 경찰은 무장 경관을 동원하여 남산동 도량은 문 닫게 하고 계산동 도량은 허가 기간 만료에 이용하여 허가를 계속하여 주지 않게 훼방하였으므로 교화는 결국 무기 중지되었다. 이로 인하여 선교님과 하영택 외 수명의 간부가 대구서에 야간 호출을 당한 일도 있었다. 교화가 중지되자 신교들의 전부는 각 요로 당국에 진정하였으나 그대로 계속하지 못하고 당시 지사 장인환(長仁煥) 씨 및 경찰서장 ...
20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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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참회원의 개설계전의 교화가 자리를 잡자 교화를 우당에게 물려주고 진기 원년(1947) 9월 25일 양동의 관가정(觀稼亭)으로 교화 장소를 넓혀갔다. 양동은 월성 손 씨의 종가가 있는 마을이다. 관가정은 본래 월성손씨 3세조 손소(孫昭·1433~1484)의 둘째 아들로서 경주 동강서원(東江書院)에 배향된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이 분가하여 살던 사가였다. 사랑채 누마루에 관가정이라는 당호를 붙여 집 전체를 관가정이라 불러왔다. 진선여중 손인수가 1980년대에 손소의 영정을 이곳에 배향하였다. 그런데 교사는 관가정 앞에 송첨(松簷)이라는 명칭을 붙여서 ‘송첨관가정’이라 부르고 있다. 송첨은 손소의 아호로서 그가 살던 서백당(書百堂·현 월성손씨 종택)의 큰 사랑방의 대들보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교사에 관가정의 명칭 앞에 송첨을 붙여서 송첨관가정이라 서술한 까닭은 알 수 없다. 양동은 월성손씨의 종가뿐만 아니라, 손 씨와 인척 관계에 있는 여강이씨의 종택도 있...
2020-07-28
진각의 세계를 열다
1) 교화의 시작과 참회원 (1) 대종사의 깨달음대종사는 100일 정진 중에 고성염송에서 심상염송(心想念誦)의 이득과정(已得過程)을 거치면서 염송삼매(念誦三昧)를 증득하였다. 진언염송의 수행은 음성염송에서 심송(心誦)으로 수행의 경지가 깊어지면서 심신이 정화되고 삼마지의 상태에 이르게 한다. 삼마지의 경지는 늘 지금 여기의 청정한 마음에 머물러서 몸과 마음, 그리고 나와 세계가 일여(一如)한 경지를 내관(內觀)하게 한다. 대종사는 먼저 육자진언의 염송수행으로 심신이 상연하고 신병이 돈유되는 불가사의한 경험을 하였다. 그리고 심일경(心一境)의 삼마지를 체험하고 법계진리를 내관하는 경지를 체득하였다. 나아가 법계 천지의 은혜가 지중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육자진언의 묘리를 증득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에 대하여 대종사의 비문은 “5월 16일 새벽 심신이 상연(爽然)하여지고 문득 동천에 솟는 태양을 보매 불은의 무변함과 천지은혜 지중함을 몸에 사무치게 느끼신 후 ...
2020-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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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득병의 인생계기대종사는 귀향하던 중 대구에서 한 달여간 머물며 그간의 심경을 정리하였다. 그때 아들(서주 손제석)이 경북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설(1946년 2월 2일)이 다가오자 포항으로 돌아왔다. 설을 맞아 고향에 돌아오자 모친이 생식의 중단을 권유하였다. 생식을 2년 가까이 하면서 수행정진과 사회활동을 병행하였다. 효순심이 강한 대종사는 모친의 권유에 수순하고 화식으로 전환하였다. 그런데 설을 지내고 득병을 하였다. 득병의 직접 원인은 화식 전환의 부작용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생식과 수행정진, 그리고 사회활동 특히 상경의 생활 등으로 심신의 무리를 느끼고 있었다. 또한 사업과 김두하의 재산관리, 그리고 삼 사건 등으로 심려가 깊었다. 그런데 그 당시 널리 퍼진 전염병 이질이 또한 큰 작용을 하였다. 대종사는 득병의 고통 속에서도 약을 쓰지 않았다. 득병의 치유를 위해 수행정진에 용맹을 더하였다. 약을 쓸 것을 권유하던 모친도 대종사의 불공을 적...
20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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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생식 수행을 시작하다제과 공장 화재 이후 대종사는 또 다른 사업을 구상하였다. 수행정진 중에서도 사업의 큰 가닥은 직접 구상하고 그 후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그것은 광산업이었다. 광산업은 일제가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을 거치면서 시행한 군비증강 정책의 하나였다. 일제가 금광 탐사의 비용을 지원하고 금을 비싸게 사들이자 많은 사람이 광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광산업에 관한 책들이 출판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부추기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산업을 시작한 것은 민족자본의 문제도 있었다. 그 당시 일제는 한반도의 산업을 독점하는 정책을 폈다. 특히 광업은 90% 이상 일본인의 자본이었다. 한민족에 의한 자본을 증대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광산업의 비약적인 진흥은 일제의 획책인 것을 알고 나서 광산업을 불시에 중지하였다. 그즈음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교화의 문을 연후에도 가끔 주위 사람들...
2020-06-08
진각의 세계를 열다
(4)사회생활을 체험하다긴 여행에서 돌아온 청년 덕상은 우선 면사무소에서 일을 하였다. 일본 경험과 한학의 지식이 면사무소 근무를 가능하게 하였다. 면사무소 근무는 2년 정도 하고 그만두었다. 25세(1926)에 규상(圭祥)으로 개명하고 도동으로 이사하여 학용품 가게를 열었다. 장남(창수)이 태어나자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 학용품 가게는 기대 이상으로 발전하여 포목·잡화·미싱 등으로 넓혀갔다. 이렇게 해서 청년 규상은 사업가로 알려졌다. 이즈음 포항의 사업가들이 울릉도를 자주 왕래하였다. 사업가 규상은 이들과 거래를 하였다. 모두가 대종사의 성실성과 사업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거래를 자청하였다. 특히 그중에 포항의 큰 사업가 김두하(金斗河)가 젊은 사업가 규상의 사업능력을 눈여겨보고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마치 형제처럼 교유하게 되었다. 김두하·김두만·김두수 삼형제는 당시 포항의 경제계에 큰 활약을 하였다. 김두하(1894~1957...
2020-05-25
진각의 세계를 열다
(2) 보통학교에 입학하다울릉도에 근대 교육기관으로서 울릉 공립 보통학교가 설립되자 대종사는 14세(1915)에 입학하였다. 울릉도에 근대 교육기관 설립은 1901년에 시작한다. 1901년 황성신문 2월 27일 자 잡보에 “울릉군수 배계주(裵季周) 씨가 해군인민(該郡人民)의 교육차로 학교를 설시하고 학부에 인허를 청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울릉군수 배계주가 울릉도가 울릉군으로 승격된 것을 계기로 1901년 1월 울릉도에 처음으로 근대학교를 설립하고 학부에 인허를 신청한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그 후 1908년 군수 심능익(沈能益)이 관어학교(觀於學校)를 건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교원은 조현우(趙鉉禹)와 일본인 요시다 히츠지(吉田未藏)의 2인이고, 학생 수는 12~13명이었다. 교과목은 일어·산수·한문 등 서당식으로 수업하고, 수업 연한은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정적 문제로 이듬해 1909년 휴교하였다. 관어학교가 휴교하자 관어학교를 이용하...
2020-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