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맘 편하게 해주는 것이 효”

편집부   
입력 : 2009-02-13  | 수정 : 200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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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효행상 수상 복지원 보살

4대 모인 대가족 맏며느리로 시집와
진리 생활하며 시조모 등 극진 봉양
상금도 돌아가신 시할머니 위해쓸터

진각성존 회당 대종사의 탄생성지 울릉도. 이 울릉도에서 67년을 살아온 토박이 복지원(이태복ㆍ선원심인당 신교도) 보살이 삼성복지재단에서 수여하는 삼성효행상을 수상했다. 4대가 모인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산지 50년을 바라보는 복지원 보살의 이야기를 대구에서 만나 들어봤다. 1월 30일 서울 태평로 삼성생명에서 열린 제33회 삼성효행상 시상식장에서 만난 복지원 보살은 20명이 넘는 친지들의 축하를 받으며 급히 자리를 떴기 때문이다.

울릉도 토박이 복지원 보살이 8남매의 맏아들인 남편에게 시집온 것은 25살이 되던 해였다. 시댁은 당시 시할머니와 시부모님, 미혼인 시동생들과 자녀들까지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한끼 밥상에 13식구의 밥그릇 챙기는 일만해도 정신이 없을 만큼 큰살림에 허리 한번 쉽게 펴지 못하는 맏며느리 자리가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중학교 선후배 사이였던 각자님과의 인연이 보통은 아닌 것 같다”고 회고했다.

결혼한지 8년,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 봄 심인당과 인연을 맺은 복지원 보살은 점차 기울어져는 가세를 위해 방앗간 안주인이 되었다. 대가족을 챙기고 방앗간 일까지 해야하는 바쁜 살림 가운데서도 정송, 정시는 빠트리지 않고 정진했다. 복지원 보살은 하루라도 거르는 날엔 마음도 불편하고 방앗간 살림도 좋지 않았다면서 지금도 늦게라도 심인당에 나가 염송은 하고 돌아온다고 했다. 정진 덕분인지 방앗간은 점차 융성했고 지금은 울릉도 북면 천부리에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방앗간이 되었다.

“저희 시할머니는 참으로 지혜 밝으신 분이었어요. 109세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까지 바늘귀도 손수 끼우시고 뒤뜰이며 마당에서 손수 마늘도 심으셨죠.”

재작년 7월 109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복지원 보살의 시할머니 얘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그는 쉼 없이 이야기를 뱉어냈다. 그는 “제가 시집오던 해에 67세였던 시할머니는 27살의 나이에 혼자되시고 4남매를 키우셨다”며 “4남매의 외아들인 시아버지 덕분에 증손인 각자님과 손부인 저까지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또 “젊어 시집와서 제가 잘못해도 큰소리도 잘 내지 않으셨다”며 “부지런하신 할머니 덕분에 부지런해졌다”고 했다.

시상식 덕분에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한 복지원 보살은 서울에 있는 딸과 성남 시동생집에서 온가족이 모여 축하파티를 열었다고 했다. 효행상을 수상한 자신을 위한 자리였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고 했다. “제대로 모시지도 못했는데 할머니 덕분에 받게된 상이라 더욱 죄송한 마음만 든다”며 “내가 잘해서 받은 상이라기 보다는 할머니께서 건강하게 오래 사신 덕분에 내가 받게 된 것일 뿐”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이 상 덕분에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다시 한번 시할머니께 감사한 마음만 가득하다는 그의 말에서 진심어린 효를 느끼게 했다.

복지원 보살은 이번 수상금을 받은 1천500만 원을 시할머니 산소 주변의 묘답을 사는데 모두 사용하기로 했다고 했다. 그는 “시할머니 덕분에 받은 상인데 할머니께 드릴 것”이라며 “나도 이제 나이가 있어서 노후자금을 준비하는데 쓰라는 이야기도 많았지만 못다한 효도를 이렇게라도 하고 싶다”고 밝혔다. 백수를 넘게 누리신 시할머님이 돌아가셨을때도 힘든 살림에 홀가분할만도 하건만 서운함과 아쉬움이 많았다는 복지원 보살은 입관 전에 손수 옷을 지어 시할머니께 곱게 입혀 드렸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효(孝)’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아주 간단하게 답했다. 복지원 보살은 “효행이라고 할 것이 있나. 함께 사는 어른들을 잘 모시는 것은 그저 당연한 일이다”며 “어르신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이 바로 효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요즘같은 세상에 대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일이 쉽진 않지만 함께 살면서 보고 배우는 것들이 아주 많다”면서 “핵가족 세대에는 본보기가 될만한 일조차 없는 게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묻자 복지원 보살은 “심인당에서도 심인진리의 으뜸덕목을 효라고 배웠다”면서 “교전을 읽고 배우면서 많이 배우고 느꼈다. 심인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여기까지 오기도 힘들었을 것 같다”고 했다. 이것 또한 종교와의 지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아침 정송과 참회가 마음닦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면서 “술을 좋아하시는 각자님도 제도되어 함께 심인당에 다니면서 심인진리를 밝혀나가는 것이 마지막 바람”이라고 했다.

한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집안 살림에 방앗간 일까지 도맡아 하면서도 어르신 봉양에 소홀함이 없었던 그는 어느 새 자신도 70이라는 나이를 바라보는 할머니가 됐다. 관절염에 허리통증, 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는 복지원 보살은 인터뷰를 마치고는 울릉도로 떠난다고 했다. 울릉도에는 제대로 된 병원이 없어서 뭍으로 한번 나올 때면 병원을 찾는다는 그는 이번에도 친지들에게 더 머물며 몸도 마음도 편히 쉬고 싶지만 정월대보름을 앞두고 있어서 얼른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복지원 보살은 “정월대보름을 맞아 섬에서는 무사고와 풍년을 기원하는 고사를 많이들 지낸다”며 “내가 가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이 멀리 남면까지 가서 방앗간 일을 봐야하는데 그 고생을 시킬 수 없다”며 웃었다. 그런 그의 웃음에서 지금까지 그가 보여줬던 효행이 그저 자신의 부모여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베풀며 살 줄 아는 진정한 보살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대구= 김보배 기자 84bebe@milgyonew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