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들여다보는 경전 74- 평등하게 대하다

밀교신문   
입력 : 202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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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와 부처님이 똑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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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바이샬리 성에 살고 있는 선덕은 큰 부자입니다. 그는 때때로 창고를 활짝 열어 사람들에게 보시를 했습니다. 어느 날, 선덕이 7일 동안 아주 대대적인 보시행사를 열어 숱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베풀던 중이었습니다. 유마거사가 찾아와서 이렇게 말을 걸었습니다.
 
“위대한 보시행사는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법을 베풀어야 하거늘 어찌 재물을 베푸는 자리가 되었습니까?”
 
자신의 보시행을 칭찬할 줄 알았는데 뜻밖의 지적을 당한 선덕은 황망하였지만 용기를 내어 ‘법을 베푼다’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유마거사는 대답했습니다.
 
“법을 베푸는 모임이란 앞뒤의 순서를 두지 않고 한 번에 모든 생명체에게 공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늘 사람들을 순서지웁니다. 누구는 귀한 분이니까 앞으로 모시고, 누구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니까 줄 뒤로 내몰지요. 귀한 분은 먼저 대접하고 그보다 못한 사람은 좀 나중으로 미룹니다. 귀한 분에게는 아주 귀하고 맛난 음식을 값비싼 그릇에 담아 대접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남은 음식들을 다 모았다가 안겨줍니다. 마음으로는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한다고 하지만 구별 짓고 줄 세우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받는 사람 입장은 어떨까요? 워낙 그런 대접을 받아왔기 때문에 당연하게 여깁니다. 게다가 ‘그저 먹고 사는 것만이 전부인 사람에게는 귀한 것 줘봤자 그 가치를 알 리 없을 테니…’ 하는 생각도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7일 동안 베풀어진 보시행사를 살펴보던 유마거사의 눈에 선덕의 이런 태도가 고스란히 비춰졌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대뜸 나서서 이런 지적을 했겠지요.
 
유마거사는 이어서 ‘법을 베풂(法施)’에 대해서 들려줍니다. 법을 베푼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자애로운 마음(慈心)을 일으키는 일이며, 연민하고 공감하는 마음(悲心)을 일으키는 일이며, 기쁨(喜心)을 품는 일이며, 담담한 마음(捨心)으로 대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지혜롭게 세상을 향해서 끝없이 베풀고, 세상을 위해서 계를 지키고, 세상을 위해서 애써 참아내고, 세상을 위해서 정진하고, 세상 속에서 참선의 경지에 들며 세상 속에서도 고귀한 진리인 반야를 얻는 일입니다.
 
유마거사의 ‘법의 베풂’에 대한 법문은 이어집니다.
 
깨끗한 기쁨이 가득 찬 마음으로 성현에게 다가가는 것도 법의 베풂이요,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항복받는 일도 법의 베풂이요, 출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도 법의 베풂이요, 가르침을 많이 듣는 일도, 다툼이 없이 텅 빈 곳에 머무는 일도, 부처님 지혜로 나아가는 선정에 드는 일도 모두가 법의 베풂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며 동물을 비롯한 온갖 생명들에게 한결같이 소중한 마음으로 다가가서 저들의 마음을 잘 알아서 그들에게 맞춰 법을 들려주고, 그래서 그들이 지혜롭게 행동하고자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법의 베풂입니다. 온갖 번뇌와 장애와 악함을 끊어서 온갖 선한 업을 짓는 것이 법의 베풂이요, 온갖 지혜와 선한 법으로 부처님의 길을 도우려고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법의 베풂입니다.
 
사람들에게 진리 한 자락을 들려주는 것에서 한 걸음 나아가 내 자신이 그런 보살행을 하는 것이 법의 베풂이고, 그런 나를 통해 상대방이 선한 법과 지혜를 향해 마음을 여는 것이 법의 베풂이라는 것입니다.
 
선덕은 법문에 깊이 감명을 받아서 유마거사의 발아래 머리를 대고 절을 올립니다. 그리고 자기 몸에 장식하고 있던 값비싼 보석꾸러미를 풀어서 올렸습니다. 너무 값비싼 보물이라 유마거사가 거절하자 선덕이 요청했습니다.
 
“유마거사님, 제발 받아 주십시오. 받으신 뒤에 거사님 하고 싶은 대로 하셔도 저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비싼 보석꾸러미를 받아든 유마거사는 그 자리에서 정확하게 둘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한 덩이는 그 보시 모임에서 가장 가난한 자에게 내밀었고, 남은 한 덩이는 부처님에게 올렸습니다.
 
그 자리에 있다가 뜻하지 않는 값비싼 보석꾸러미를 받은 거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게다가 부처님에게보다 자기에게 먼저 보석 꾸러미를 내밀지 않았습니까.
 
가장 훌륭한 부처님과 가장 낮고 천한 거지의 순서가 바뀌었고, 보시물은 똑같았습니다. 부처님과 거지가 평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보시입니다. 주는 사람의 마음에 차별이 없기에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행동에는 차별이 깊이 드리워져 있지요. 그런데 유마거사가 보란 듯이 그걸 깨버린 것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시주자가 세상에서 제일 천한 거지에게 무엇인가를 베풀되 그를 여래복전이라고 생각해서 마음에 차별을 두지 않으며, 커다란 연민을 평등하게 일으키되 과보를 구하지 않으면 이것을 완벽한 법의 보시라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을 놀라게 한 사건은 다음에 벌어집니다. 부처님에게 올린 값비싼 보석꾸러미는 그대로 부처님 머리 위를 아름답고 화려하게 장식하였습니다. 부처님 회상(會上)이 누구라도 반할 정도로 멋지게 꾸며진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감탄을 쏟아내며 말했습니다.
 
“아, 저것 좀 봐. 부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세상은 저렇게 아름답고 화려한 곳이네. 깨달음에 이르면 저런 세상이 펼쳐진다는 거잖아. 나도 저런 세상을 펼치고 싶어.”
 
보석꾸러미를 부처님과 똑같이 나눠가진 거지도 부처님의 화려한 회상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마음을 품게 됐습니다.
 
“아, 나도 깨달음이란 걸 한 번 좇아가 봐야겠다. 그렇다면 나도 저토록 아름다운 세상을 펼칠 수 있지 않겠어?”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발심입니다.
 
밥 한 끼를 얻어서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만이 인생의 최대과제였던 거지가 부처가 되고 싶다는 마음, 부처의 지혜(아뇩다라삼약삼보리)를 한 번 얻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킨 것입니다. 평등은 세상 사람을 기계적으로 똑같이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존감 낮은 이로 하여금 기꺼이 나아지고픈 마음을 일으키도록 인도하는 것, 그래서 스스로가 보잘 것 없는 존재라 여기며 슬프게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갈 힘을 내게 하는 것이 바로 유마거사가 일러주는 세상을 평등하게 대하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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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마옥경

 

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