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각의 세계를 열다

밀교신문   
입력 : 2021-04-30  | 수정 : 2021-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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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교법의 정비와 종조의 열반

5) 교화의 외연 확대

 

(3) 위덕학사의 설립(3) 위덕학사의 설립

종립학교 심인중·고등학교는 적지 않은 난제를 이겨 가면서 운영하였다. 종립학교의 교명을 교리의 상징으로 하기 위해서 중학교는 심인으로 하고 고등학교는 복전(福田)으로 개칭하기로 결의하였으나(12,1.7) 실행하지는 않았다. 불교의 복전정신을 널리 펴고 사회에 은혜정신을 실천하도록 하려는 뜻이었다. 

 

중·고등학교 교직원의 신행생활을 독려하기 위해 각서를 받았다(12,7.12). 심인중·고등학교는 4·19 혁명을 계기로 힘든 분규를 겪었다. 먼저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 따라서 어용학자 축출 농성이 일어났다. 

심인중학교의 교사들이 연명으로 박성목(朴成睦) 교감의 사퇴를 요구하고(14,5.6), 또한 봉급 인상을 요구하였다(14,5.11). 재단은 봉급인상 문제는 공납금을 인상하여 해결하고, 재단에서 결의하여 임명한 교감의 사퇴요구는 월권으로 교권을 침해하는 행위이므로 철회하도록 강력히 대처하였다(14,5.14). 재단의 확고부동한 대처로 사태가 진압되는 듯 하였으나 고등학생 일부가 선동하여 동맹 휴교를 강행하였다(14,6.18). 재단은 여전히 학생들의 월권적 교권 유린 행위에 대하여 강력하게 대처하면서 교직원 전원과 인회 직원 간의 합석 절충을 하였지만 교직원의 고집으로 결렬되었다(14,6.20). 심인중학교 교사가 연명으로 사직원을 제출하자(14,6.21) 재단은 분규를 일으킨 대부분의 무자격 교사를 정리하기 위해 심인중·고등학교의 공립화를 제기하였다(14,6.22). 심인중·고등학교의 공립화에 대해 스승 중에서는 박대준을 제외하고 모두 찬성하고, 학생과 유자격 교사는 찬성하였지만, 무자격 교사는 반대하여 찬반이 대립하였다. 그래서 재단이사회와 심인중·고등학교 사친회를 열어서 수습을 시도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박성목 교감이 자진 사퇴를 고집하여 박 교감은 역경과 출판 방면의 일을 보기로 하고 사퇴를 수리하였다. 한편 교사전원과 학생 대표에게 앞으로 유사한 불미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분규사건은 일단락되었다(14,6.23).

 

분규사태가 진행하는 중에 교사봉급을 올리고 교명을 청원(淸圓)으로 변경하기로 결의하였다(14,5.30). 교명인 심인의 발음이 오해도 있고 좀 더 부르기 쉬운 명칭인 청원으로 변경결의 하였으나 역시 실행은 못 하였다. 박성목 교감의 사퇴로 공석이던 심인중·고등학교 교감에 남산동심인당 최호석(崔虎錫)을 임용하고 교장서리를 겸임하게 하였다(15,4.3). 그러나 5·16 쿠데타 정부는 최호석 교장서리를 4.19혁명 이후 교원 노동조합 간부의 이력 혐의로 검거하여 5일 후 형무소에 수감하였다(15,5.31). 대구시내 스승과 학교교직원 전원 및 학생대표의 명의로 최호석 교장서리 석방 진정서를 대구육군방첩대장 경북지구계엄사무소장 대구지방경찰청장 경북 경찰국장 앞으로 보냈다(15,6.14). 진정서 제출에 의해서 최호석 교장서리는 석방되고 당국의 방침에 따라서 사직하여 역경과 출판 관계 일을 보도록 하였다(15,6.30). 최호석 교장서리가 사직하고 경북도지사의 통첩에 의해서 병역미필 교사와 사환을 해임하였다(15,6.27). 그리고 박성목을 다시 심인중·고등학교 교장서리에 임명하였으나(15,7.10) 교사들의 반발로 사임하였다(15,10.9). 재단은 최호석을 다시 교장 사무취급과 심학(心學) 스승으로 임용하였다(15,10.16). 중고등학교의 심학시간은 수요일 전교생을 대상으로 1시간 동안 하는 것으로 개편하고 대종사와 손대련이 담당하기로 했지만(15,10.14), 최호석으로 대체하였다. 

 

심인중·고등학교는 분규를 겪는 동안 학생 모집이 어려워서 경영의 위기를 맞았다. 학생모집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고등학교에 각 학년 한 학급씩 학비면제의 장학생 제도를 결정하였다(15,5.1). 장학생 제도에도 불구하고 학생 모집미달로 문교부 규정에 의하여 폐교처분을 받았다(15,12.15). 

 

고등학교의 폐교 위기에서 학교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 박필규(朴畢圭)를 교장으로 채용하기로 하여(15,10.26) 채용승인을 기다리는 중에 교장서리로 부임하고(16,2.2) 정식 교장 채용승인을 받아서 취임하였다(16,3.22). 그리고 중학교는 학생모집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남녀공학으로 학칙을 변경하고 문교부의 인가를 받았다(16,1.9). 남녀공학의 학생모집이 학교의 주변환경 등의 문제로 효과가 없어서 남녀공학을 폐지하고 각 학년 남자 5학급으로 학칙을 변경하였다(16,12.31). 그러나 신입생이 한 학급만 모집이 되어서 학교 존폐의 위기를 맞았다(17,3.11). 학교경영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종비장학생 제도를 제안하여 재단의 승인을 받아서 2학급의 신입생을 모집하였다. 박필규 교장의 사퇴로 손인수 교장이 취임하여(18,4.1) 학교 경영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사립학교법이 공포 실시되어 금강회 총회를 열고 유지재단이 경영하던 심인중학교 재단을 분리 신설하기로 결의한 후 신설 학교법인 임원을 선임하였다(17,10.18). 이사장 손대련, 이사 김철 등 6명과 감사 2명을 선출하였다. 종교재단과 교육재단을 분리하라는 대종사의 유교에 따라서 학교법인을 신설하고 법인의 명칭을 위덕학사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사회를 개최하고 학교법인 정관을 심의 결정하고 손대련 등 임원을 선출하였다(17,11.2). 경상북도에 학교법인 위덕학사 인가신청을 제출하여 인가를 받아서(18,3.25) 학교 경영을 새롭게 출발하였다. 중고등학교의 분규를 해결하는 중에 유치원 설치를 결의하였다(14,5.30). 교육기관이 교화에 크게 영향을 미치므로 우선 대구에 1개소의 유치원을 설치하여 효과에 따라서 확대 실시하기로 하였다. 유치원 설치는 결의로 끝나고 실행하지 못하였다. 


6) 종조의 열반과 종제의 재정비


(1) 종조의 열반

대종사가 수행과 교화로 주야 정진하던 중에 득병하여 침산심인당으로 거처를 옮겼다(17,5.18). 사택이 서남에 있는 침산심인당에서 서남법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49일 정진을 시작하였다(17,5.20). 7주 정진의 5주째 시작 날 저녁 공식시간 중에 졸도하여 가족의 의견에 따라서 의사를 불러 응급치료를 하였다. 다시 내과 의사를 불러 진찰한 결과 위궤양으로 위천공이 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인근 병원에서 수술이 불가능하여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다(17,6.18). 위 천공 수술이 끝나고 의사는 주먹 크기의 암 덩어리가 발견되어 그대로 봉합하였는데, 위암은 수술 시기가 늦어서 수술하면 생명에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위암이 유문(幽門)을 막아서 음식을 먹지 못하고 구토가 심하여 다시 수술하였다(17,7.8).

 

육자진언 염송소리가 잘 나오지 않고 육자진언 염송하면서 약을 쓰지 않는 법을 세운 까닭에 가족과 함께 염주를 세면서 미본진언을 염송하였다(17,7.29). 주치의의 승낙을 받아 퇴원하여 침산심인당에 돌아가서(17,8.24) 최고지도자의 호칭을 원정으로 개칭하였다(17,8.31). 병세가 나날이 침중(沈重)하여 약효가 없고 악화되어서 약과 주사를 완전히 끊고 육자진언으로 일 주간 원정각과 같이 최후의 정진을 하였다(17,10.5).

 

대종사는 최후의 유교(遺敎)를 내리고 열반에 들었다. 대종사의 부법교계(附法敎戒)는 3차에 걸친 유교로써 내렸다. 그리고 몸소 유교를 내리면서 배석자의 물음에 답하였다. 

 

1차 유교는 침산심인당 사택에서 선교 손대련 스승 배점시, 박운이, 선태식, 박갑은, 배신, 아들 손제석이 동석한 가운데 하였다(17,10.5 오후 5시). 

 

교계사항은 “1. 원정은 우선 부법제로 하고 일본 진언종의 체제를 보아서 일본 진언종파에서 선거제로 하거든 선거제로 해도 무방하다. 2. 종교재단과 교육재단을 분리하라. 3. 출가제법을 조속히 세우라. 4. 교의 본부는 서울 동부 적당한 교외에 선택하여 건설하라. 5. 교육재단의 주소는 대구로 하라. 6. 스승은 약 먹는 스승과 약 안 먹는 스승으로 하라. 7. 교명은 대한불교진각종으로 하라. 8. 앞으로 신(新) 건설은 반드시 서남법을 준수하라. 9. 장의는 삼일장으로 하고 화장하여 유골은 갈아서 낙동강물에 흩으라. 그리고 적당한 장소에 비석을 세워라. 10. 상복은 아직 우리 교의 복제가 확정되지 않았으니 유교 복제로 하라.”

 

2차 유교는 침산심인당 사택병실에서 선교 손대련, 배점시, 윤극수, 배신을 상대로 하였다(17,10.11, 오후 5시). 교계사항은 “1. 출가법은 본인의 부모 혹은 자녀 등 가족 친척의 서약을 받고 허물의 참회와 악벽(惡癖)의 개과를 서약 받은 다음 출가시켜야 한다. 2. 출가인의 의제는 황색으로 하고 고깔은 백색으로 하라. 3. 출가인은 우선 법을 지키고 심인당을 지키고 사무처리 기타에 그치고 교화는 근기를 보아서 수년 후에 점차 담당케 할 것이오, 교화활동의 주동은 재가인이 하게 하라. 4. 명정(名旌)과 비석에는 ‘대한불교진각종종조손규상거사지구’ 또는 ‘지비’라고 하라.”

 

3차 유교는 침산심인당 사택병실에서 선교 손대련, 스승 김철, 윤극수, 김경순, 배점시, 아들 손제석, 딸 손숙희, 동생 손규복, 또 강추당에게 내렸다(17,10.15, 12시 30분). 교계사항은 “옛날에는 의발이요 이제는 심인법(心印法). 스승이 되어서 양운 무 약불(藥不) 서남(西南)”이다.

 

그런데 교사는 이 내용을 “옛날에는 의발을 전했고 이제는 심인법을 전한다. 스승이 되어서 약을 끊고 서남법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라야 내 법을 받을 수 있다. 내가 전하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라고 정리하고 있다. 또한 회의록에는 “이전에는 조사가 의발을 전하고 이제는 심인법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대종사는 몽당연필로 힘겹게 유교를 종이에 썼다. 회의록은 역시 종조가 아니라 조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교계의 근본은 ‘심인법’이고 지말은 ‘스승이 되어서 양운 무 약불 서남’이다. 여기서 ‘양운’은 ‘약은’으로 해독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런데 ‘스승이 되어서 양운’과 ‘약불’의 어떻게 다른지는 논의해야 할 일이다. 

 

대종사는 최후의 유교를 내리고 오전 10시 침산심인당 사택에서 스승과 가족이 모인 가운데 열반이 들었다(17,10.16). 대종사의 열반에 비통함을 금치 못하여 오열(嗚咽)하지 않는 자 없고 강산과 초목도 슬픔에 잠겼다.

 

대종사는 육신의 무상함을 보여주고 한 생애를 중생을 위해 회향하고 개교 17년 만에 세납 62세로 비로법계로 돌아갔다. 대종사의 열반 후 긴급 임시 인회를 열고 열반강도를 올리고 장의에 관한 사항을 의결하고 장의준비위원회를 조직한 후 각 부서에 따라서 장의 준비를 시작하였다(17,10.16). 결의사항은 “1. 장의식은 교단장으로 하고, 2. 장의비용은 인회부담으로 하고 부의는 모두 유가족에게 전달하며, 3. 대종사에 관한 지불의 1년 반 분을 사망연금으로 유가족에게 지출하며, 4. 교계에 의하여 삼일장으로 하고 유골은 화장하여 수장하며, 5. 대종사를 대한불교진각종개조로 추대한다”라고 결의하였다. 또한 장의위원회와 부서는 장의위원장 손대련 밑에 총무 재무 의례 조달 및 섭외의 4부를 두었다. 그리고 입관과 성복을 하고(17,10.17) 고결식과 다비를 집행하였다(17,10.18). 심인중학교 광장에서 불교종단의 대표단과 스승 신교도 학생 일반대중 수천 명이 운집한 가운데 오전 10시 30분 고결식을 시작하였다.

 

고결식을 마치고 심인중학교 교기를 선두로 고결식장과 다비장까지 행렬이 연결되었다. 다비장 광장에 정렬하여 다비강도를 하고 육자진언 염송으로 다비를 시작하였다. 다비 후 스승 교도 일반 군중이 사리를 배견(拜見)하는 가운데 유골을 수습하였다. 유골을 수습하고 다시 차량이 행렬지어서 수장 예정지인 낙동강변 화원유원지에 도착하였다. 수장에 참여하는 이는 선박에 승선하고 일반 신교도는 강변에서 수장강도를 하였는데 오불귀명의 소리가 강변에 진동하였다. 강변에 운집한 신교도와 대중의 진언염송 소리가 비로법계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대종사의 유골은 법계로 돌아갔다.

 

종조의 사리와 존영은 오후 5시경 대열을 이루어 침산심인당에 도착하여 스승과 가족이 참석하여 봉안강도를 하였다(17,10.18). 그리고 종조의 사리와 존영은 수많은 신교도의 봉송을 받으며 서울심인당으로 이안(移安)하였다. 그리고 전 스승과 신교도가 종조열반 49일정진을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 서울 밀각심인당에 전국 심인당 스승과 신교도 대표와 많은 신교도가 동참하여 제1회 종조멸도제를 봉행했다(18,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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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종 역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