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십칠존이야기-37. 금강령보살

밀교신문   
입력 : 201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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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과 함께 불도로 나아가는 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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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가 어떠한 자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겠지만 불교에서는 가장 악한 자를 일천제라 하고 있다. 일천제(一闡提)는 선근이 끊겨져서 구원받을 가망이 없는 자로서 ‘선근을 끊어버린 자’, 또는 ‘믿음을 갖추지 못한 자’라고 풀이할 수 있다. 원래의 뜻은 ‘욕구를 계속하는 사람’이나 세속적 쾌락만을 추구하고 또 불교의 가르침을 훼방하여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자라고 한다. 즉 성불하는 인(因)을 갖지 못한 이로서 스스로도 성불하지 못할 뿐 아니라, 누군가가 성불하는 길로 가는 것을 막아서며 함께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자이다.
 
그런데 <입능가경> 2권에는 일천제를 두 가지로 분류한다. 본래 해탈의 인(因)이 없는 단선근을 가진 단선천제(斷善闡提)와, 보살이 일체중생을 제도하고자 고의로 열반의 깨달음에 들어가지 않는 대비천제(大悲闡提)의 둘이다. 대비천제는 보살천제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지옥중생이 모두 성불하기까지 스스로의 성불을 유보한 지장보살이 대비천제이다. 그러나 앞의 단선천제와 다른 점은 타인의 성불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갈 수 있도록 스스로 성불의 인을 유보한 것일 뿐이다.
 
단선천제의 경우 불종자를 끊는다는 것으로 최고의 악이지만, 대비천제는 불종자를 잇는다는 것으로 최고선이라 할 수 있다. 두 경우에 성불에서 멀어진 것은 같기에 다 천제라고 하지만, 함께 가지 않는 단선천제와 모두와 함께 나아가려는 보살천제는 그 방향이 다르다.
 
금강계만다라 37존에서 맨 마지막 위치에 있는 금강령은 중생들에게 환희심이 일어나도록 방울을 흔들어서 중생의 마음에 불종자를 일깨워 불도로 나아가도록 옆에서 함께 거들어주는 보살이다.
 
사섭보살에서 제일 먼저 금강구보살이 갈구리를 사용하여 중생들을 깨달음의 성에 불러모으고, 금강삭보살이 불러들인 중생들을 잘 인도하여 이익을 주며, 금강쇄보살에 의해 중생을 깨달음의 성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면 마지막으로 금강령보살이 깨달음의 성에 머무는 중생들에게 보리심의 종자가 싹이 터서 자라나게끔 돕는 일이다. 종자(種子)란 씨앗이라는 의미로 무엇인가가 생겨날 가능성을 가리킨다. 초목의 종자가 갖가지 싹을 틔우는 것처럼 보리심의 씨앗이 성불의 원인이라고 생각되므로 이것을 종자라 하는 것이다. 종자가 싹이 트면 부처의 나무가 자라난다. 그 자라남을 위한 만남은 기쁨이며 함께 가는 길은 더욱 큰 기쁨이다. 금강령보살의 방울은 함께 가는 기쁨의 심정을 드러내어 묘사하고 있다.
 
함께 가는 기쁨을 <승만경>의 성(城)에 들어가는 비유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선남자여, 마치 어떤 성의 가로 세로 넓이가 각각 1유순이고, 많은 문이 있으며 그 길이 험하고 캄캄하고 어두워서 아주 겁이 나지만, 일단 성에 들어간 사람은 많은 안락을 받는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오직 외아들만 있어서 사랑하는 마음이 매우 깊었는데, 저 성이 그렇게 즐겁다는 말을 멀리서 듣자, 즉시 외아들을 버리고 성으로 가서 들어가려고 하였다. 이 사람이 방편으로 험한 길을 지나서 저 성문에 이르러, 한 발은 문 안에 들여놓고 한 발은 아직 들여놓지 않은 때에 문득 그 아들이 생각났다. ‘나는 오직 외아들만 있는데 올 때에 왜 끝까지 같이 오지 않았을까? 누가 기르고 보호하여 뭇 고통을 여의게 할까?’ 그리고는 즉시 안락한 성을 버리고 아들의 처소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선남자여,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이 중생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오신통을 닦아 익혀서 거의 번뇌를 다하면서도 증득을 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생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신통을 버리고 범부의 세계로 향한다. 선남자여, 성은 대반열반을 비유하며 험난한 길은 여러 마구니의 업을 비유하고, 성문에 도달한 것은 오신통을 비유한다. 한 발을 들여놓음은 지혜를 비유하며, 다른 발을 들여놓지 않음은 모든 보살이 해탈을 아직 증득하지 않음을 비유하며 외아들은 일체중생을 비유한다. 이런 보살은 즉시 대비심을 일으켜 일체 모든 중생을 구하기 위하여 중생의 세계로 돌아가 열반을 취하지 않는다. 또 모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세간에 나아가 범부의 경지를 나타내 보인다.”
 
그래서 보살은 보살천제가 되어 모든 이와 함께 하고자 한다. 이러한 보살행은 사섭법에서 동사(同事)의 덕에 상당한다. 금강령보살이 상징하는 사섭법 가운데 동사섭이란 불종자를 갖고 있는 중생이 그 불종자를 키울 수 있도록 외아들처럼 끝까지 버리지 않고 함께 하는 것이다. 모든 중생과 더불어 함께 나아가는 것이 보살의 궁극이다. 그래서
 
37존의 마지막 마무리는 중생과 언제나 함께하는 보살인 금강령보살로 귀결짓고 있다.
 
금강령은 밀교 법구의 하나로서 금령(金鈴)이라고도 한다. 제존을 경각시키고 또는 기쁘게 하기 위하여 수법 중에 흔드는 방울로 금강저의 한 끝에 매어 있다. 수법(修法)할 때 중생을 독려하여 정진하게 하고 여러 부처를 권청하며 일깨우고 환희하게 하기 위하여 울리는 악기이다. 종 모양의 방울 부분과 손잡이로 이루어지며, 손잡이 끝의 양식에 따라 독고령·삼고령·오고령·보주령·탑령이라 일컫는다.
 
금강령은 달리 금강편입이라 하는데 중생들을 널리 불러들이는 보살이라는 뜻이며, 밀호는 ‘해탈금강, 환희금강’이다.
 
<금강정경>에 의하면 금강령보살은 일체여래의 편입대사삼매로부터 출생하였다. 대일여래가 유정을 경각시키고 불도에 귀명하여 들어오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금강령의 삼마지에 주하여 이 보살을 유출한 것이다. 그것은 일체중생에게 환희를 시여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염송결호법보통제부>에 일체여래의 모든 일을 불러모은다고 하는 것처럼 금강령은 방울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세계로 향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본문에서 편입이라 한 것은 금강령을 흔들어 나오는 묘한 소리가 두루 일체의 몸과 마음에 들어가는 까닭이다.
 
<성위경>에는 다음과 같이 금강령의 삼마지를 설한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반야바라밀금강령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반야바라밀금강령삼마지지로부터 금강령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춘다. 일체여래의 바다처럼 모인 성중과 금강계도량에 머무는 자를 환희케하고, 일체중생의 이승의 갖가지 견해를 부수어 반야바라밀의 궁전에 안치한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하기 위하여 금강령보살형을 이루고 정진호를 지키며 북문의 월륜에 머문다.”
 
여기에서 금강령은 흔들면 소리가 나는 법구로서 반야바라밀에 입각함에서 오는 기쁨의 소리를 나타낸다. 일체중생에게 금강령을 들려줌은 곧 반야바라밀의 법문을 들려줌과 같다. 중생은 금강령의 소리를 듣고 보살과 함께 불도에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인왕반야다라니석>에서는 금강령이란 반야바라밀의 뜻을 나타낸다. 방울을 흔들어 우매한 중생을 깨우치는데 한 번 방울소리를 들으면 반야바라밀을 깨쳐 알게되므로 최일체마원보살, 즉 모든 마구니의 원한을 부수는 보살이라 한다. 이 까닭에 이 보살은 손에 금강령을 지닌다고 한다. 이와 같은 금강령의 묘용을 <삼십칠존례>에서는 ‘환락지’라 한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는 다음과 같이 그 관과 인계를 설한다.
“행자는 이 삼매로부터 일어나 정동방의 금강령보살의 관문을 관하라. 스스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금강령이다. 금강령인을 결하면 곧 모든 불과 보살들이 애념하실 것이다. 그리고 금강령인을 결하는데 좌우의 손가락을 사용하여 오른쪽으로 왼쪽을 누루고 다 각각 서로 교차하는 것을 마치 요령의 모습과 같게 한다.”
이처럼 금강령보살은 모든 불과 보살들이 애념케하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 구체적 내용을 인계에서 볼 수 있다. 인상은 금강령으로 두루 경각함으로 말미암아 일체를 편입하여 환희케 하는 것으로 ‘금강환희인’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중생뿐만 아니라 모든 성현들도 포함된다. 이 보살의 진언을 송하면 중생을 부처의 도시에 머물게 하며 일깨워서 감동시키는 공덕이 있다고 한다.
 
<약출염송경>에는 금강령의 인계를 결하면 환희를 일으킨다고 하여 실상에 안주하고, 부처의 법문을 듣고서 법열에 잠기며 또한 일체의 중생들에게도 환희를 생하게 하는 금강령보살의 공덕을 찬탄하고 있다.
성신회에서는 삼매야형으로 금강령을 들고 있으며 형상은 몸 전체가 청색이고 왼손은 권을 쥐고 허리 앞에 두며 오른손은 엄지와 검지를 펴고 나머지는 구부려서 가슴 앞에 두고 있다. 미세회에서는 양손에 금강령을 들고 있다. 이 존은 중생들을 끌어들여 환희하게 하는 작용을 상징한다. 마치 어부가 물고기를 잡을 때에 방울을 흔들어서 기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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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 교수/위덕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