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한의 현존사찰-강원도 표훈사(상)

밀교신문   
입력 : 2019-03-11  | 수정 : 2019-04-08
+ -

금강산, 첫 문을 열다

KakaoTalk_20190225_173357043.png


내금강 표훈사
표훈사는 ‘집’이다. 금강산의 주인 법기(담무갈)보살이 살던 절(伽)이다. 금강 만다라의 세계가 펼쳐진 사찰이다. 금강산 4대 고찰로 전쟁의 화마를 피했다. 표훈사는 내 금강산을 찾는 이들에게 첫 관문이다. 주인의 허락은 물론 인사드리는 것은 사람됨의 도리이다.
 
흔히 금강산이라면 내금강을 가리킨다. 38선 북쪽의 금강산은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나뉜다. 신라시대부터 불러온 상악은《삼국사기》에 처음 기록됐다. 문헌에 나오는 별칭은 모두 12가지다. 봉래·풍악·선산·설봉·해악·개골과 불교의 이름인 기달·중향성·지달·열반·금강 등이다.
 
단풍이 아름다운 산으로 풍악, 산봉우리가 모두 뼈를 드러낸 것 같다며 개골이라는 두 명칭이 13세기까지 주로 사용됐다. 산세를 형상화한 명칭 이외에 금강은 14세기 후반부터 불리게 되었다. 봉래는 16세기 후반 양사언에 의해 더 유명해졌다.
 
사계절에 따라 각기 다른 4색의 이름은 1530년《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유래됐다. “산 이름이 다섯인데 금강·개골·열반·풍악·기달로 백두산의 남쪽 가지다. …산은 무릇 일만 이천 봉이다. 바위가 우뚝하게 뼈처럼 서서 동쪽으로 창해를 굽어보며 삼나무와 전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일출봉, 월출봉 두 봉우리가 있어서 해와 달이 뜨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19세기 들어 이유원은 <금강풍엽기>에서 “금강산은 봄에 기달, 여름에 봉래, 가을에 풍악, 겨울에 개골이라 한다.”고 처음 붙였다.
 
일반적으로 금강산인데, 새싹과 꽃이 온산에 뒤덮이는 봄의 이름이다. 녹음이 드리우는 여름에는 신선이 사는 봉래, 가을에는 일만 이천 봉우리가 단풍으로 물들어 풍악, 겨울에는 나뭇잎이 떨어져 바위가 앙상하게 드러나므로 개골산이라 불렀다. 산의 본래 모습이 드러나는 개골산은 다르게 열반산이라 부른다.
 
불경에 처음 기록된 금강산
한반도에서 널리 알려진 산은 금강산이다. 7세기 말 중국 당나라에까지 알려졌다. 중앙아시아 출신의 쉬크샤난다(實叉難陀)가 699년에 80권으로 번역한《신역화엄경》<제보살주처품>에 처음 등장했다. “동북방 청량산 다음에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 있다. 그곳에 법기보살이 거처하며 1,200명(구역화엄경에는 1만 2000명)의 권속과 더불어 머물러 있으면서 설법하고 있다”고 하여 불경에 포함되었다.
 
이 일은 신라의 의상대사에 의해서다. 7세기 중엽, 중국 당나라로 구법을 간 의상은 화엄종의 태두 지엄의 문하에서 법장과 함께 화엄철학을 정립했다. 이때 의상대사가 법장의 동의를 구해 도교의 봉래산을 우리나라의 금강산으로 확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법장의 화엄종통을 계승한 징관이 787년 찬술한《대방광불화엄경소》에는 “동해의 동쪽 가까이에 산이 있는데 이름을 금강이라고 한다. 비록 전체가 금은 아니지만, 위아래 사방 둘레 또는 산간에 흐르는 물속에 모두 금이 있으므로 멀리서 바라보고는 곧 전체가 금이라고 말한다. 또 해동인이 예로부터 전하기를 이 산에서 가끔 성인이 출현한다”고 주석을 처음 달았다. 8세기 후반부터 중국인들에게《화엄경》이 대중화되면서 경전에 나온 금강산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이로부터 금강산의 유래는 모두 그 경전을 인용하게 된다.
 
14세기 중엽, 고려의 최해는《졸고천백》에서 “세상에서는 풍악이라고 이르는데 스님들이 금강산이라 부른다”고 산 이름을 썼다. 이곡은 <금강산장안사중흥비>에서 “금강산은 옛날에 동방 사람들이 애초 그런 줄을 알지 못하고서 단지 ‘선산’이라고만 지칭했다.” 또 “화엄경에 이르기를 ‘동북쪽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다. 그곳에서 담무갈 보살이 1만 2,000명의 보살과 함께 항상 반야를 설법하고 있다’고 했다. 신라시대에 탑묘를 증보하고 꾸밈을 시작하면서부터 암자가 벼랑과 계곡 가까이에 잔뜩 들어서게 되었다”고 했다. 이처럼 금강산은 고려 후기로부터 성지로 인식되었다.
 
1454년《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금강산은 천 개의 봉우리가 눈처럼 서서 높고 절묘함이 으뜸이며, 또한 불서에 담무갈보살이 머물던 곳이란 이야기가 있어 사람들이 인간 정토라 부른다. 전하기로는 중국 사람들이 또한 이르기를 ‘고려국에 나서 친히 보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러나 재상 하륜은 <송풍악승서>에서 “금강산이라 일컫는 것은 장경의 설을 가탁한 것일 뿐이다”고 했다. 이처럼 조선 사대부들은 금강이란 불교 용어를 쓰지 않으려고 <동유기>, <풍악첩> 등의 이름으로 기행문을 남겼다. 조선 후기의 성대중은《청성잡기》에서 “금강산은 기이하고 변화무쌍한 것이 석가여래와 같다”고 평했다.
 
가고 싶었던 금강산 유람
20세기에도 금강산은 마음대로 갈 수 없었다. 고려 때까지는 왕실과 출입을 허가받은 이들만이,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나 고급 관료들만이 드나들었다. 지금도 이 산을 유람하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곳에서 살았고 지금에 사는 이들은 예외다.
 
고려 태조 왕건과 조선 세조의 금강산 행차가 가장 화려했고 전설과 신화를 낳았다. 그 유명한 이야기는《태종실록》에 실려 있다. 1404년 9월 어느 날 조정에서 “왕(태종)이 하륜·이거이·성석린 등과 정사를 논하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중국 사신들은 조선에 오기만 하면 왜 금강산에 가려고 하는가? 재상 하륜은 일찍이 송나라 시인이 노래하기를 ‘바라건대 고려국에 태어나 한 번만이라도 금강산을 보았으면 한다(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고 대답했다.” 단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는 당송 8대가 소동파까지 끌어들인 하륜의 기지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 글귀는 금강산을 일컫는 대명사가 되었다.
 
중국 사람들조차 유람하기를 원했다던 금강산, 한양 도성에서 불과 수백리 밖에 안 되는 데 가본 사람은 드물고 특혜를 받았다. 16세기 초, 송도의 명창 황진이는 담대하게도 여성 신분으로 금강산을 순례했다. 성리학자 이황은 <금강산> 시에서 “금강산 아름답다는 말 듣고 마음속으로만 20년. 애태우다 아름다운 곳 찾아왔다. 더 좋은 가을날에...”라 했다. 순조 때의 심노숭은《해악소기》에서 “조선 땅에 살면서 금강산을 보지 않고 죽으면 저승에서는 황토 한 삼태기를 저 나르게 한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1924년 최남선은《금강예찬》에서 금강산이 산의 왕으로 추대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금강산은 보고 느끼거나 할 것이요. 형언하거나 본떠낼 것은 못 됩니다. 하느님의 의장에서도 지극히 공교한 것이거늘 사람의 변변치 아니한 재주를 어디에 시험한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청학이 품은 곳, 표훈사
16세기《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산 “안쪽과 바깥에 모두 108곳의 절이 있는데 표훈사·정양사·장안사·마하연·보덕굴·유점사가 가장 이름난 사찰이라고 한다.”
 
1572년 양대박은《금강산기행록》에서 “금강산 안에는 총림 네 개와 정사 108개가 있다. 그 나머지 산사의 세찬 폭포, 아름다운 골짜기의 기이한 바위는 다 기록할 수 없다.” 또 “법령(스님)이 말하기를 ’여기는 학이 사는 곳입니다. 매번 정월 대보름에 구름과 하늘 사이에서 깃털을 가다듬고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봄을 지나 깃털을 갈고, 가을이 되면 하늘로 올라 가 버립니다’고 했다.”
 
표훈사는 청학이 깃들어 살았다는 청학대(靑鶴臺)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돈도봉과 오선봉이 있고, 서쪽에는 천일대와 된불당이 반달처럼 자리하는 형세다. 그 연유로 전설에 나오는 신선이나 학이 노는 곳으로 불리게 되었다. 천일대는 ‘하늘 아래 경치가 첫째가는 좋은 곳’ 등으로 불린다. 백제 무왕 때의 무착조사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육당 최남선은 “옛 스님네들은 법안뿐 아니라 산수안(山水眼)도 갸륵하심을 알겠다”고 했다.
 
1942년 탄월 스님이 편찬한《유점사본말사지》<표훈사지>에는 무왕 원년(600년)에 백제의 관륵·융운이 신림사를 개창하고, 문무왕 10년(670년)에 신라의 신림·표훈·능인대사가 중창하고 표훈사로 바꾸었다.
 
왕립사찰의 사세 
표훈사는 고려 말기에 들어와 장안사와 더불어 국제화된 절이다. 14세기 원나라의 황제 영종이 시주하고 음식을 베풀었다. 1366년 나옹 왕사가 16성상을 조성했다. 원황제 혜종의 제1 카툰이던 기황후의 후원도 많아 원나라의 밀교가 유입되고 왕립사찰의 위용을 가졌다. 조선시대에도 위상은 그대로였다. 세종 당시에 표훈사는 1,500여 명의 승려가 수행할 정도로 대사찰이었다. 명나라 사신이 직접 와서 대중 공양을 올렸다. 세조 4년에 왕명으로 대거 중수했다. 세조는 친히 표훈사와 정양사에 와서 효령대군과 함께 수륙회를 베풀었다. 1656년 범종을 처음 만들었다. 종의 무게가 1500근이었다. 1776년 폭우로 피해를 보자 1778년에 대규모로 중수했다. 1796년 정조는 세조의 원당으로 지정해 보수했다. 그 후 수차례 중수를 거듭하다 1930년 6월 대홍수에 큰 피해를 보았다.
 
해방과 분단 이후에도 1950년대 북한 당국의 지원으로 복구됐다. 반야보전, 능파루를 비롯한 7동의 건물, 산길에 이르기까지 모두 개건되었다.
 
금강산 순례를 꿈꾸다
2007년 여름 한 철 동안에만 문이 조금 열렸다. 필자도 그해 여름, 내금강을 직접 순례했다. 버스로 외금강에서 고개를 넘어 내강리로 갔다. 표훈사는 내금강의 첫 관문이었다. 되돌아보면 꿈같은 이야기다. 행운이었다. 아직도 구순의 어르신들은 “내가 말이야 경성에서 금강산으로 기차 타고 수학여행을 갔었지”라고 종종 말한다. 서울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내금강 만폭동 코스를 두루 보고 그날 밤에 되돌아오는 당일 코스도 얼마든지 가능한 얘기다. 예나 지금이나 금강산 구경은 최고의 선물이자 스펙이었다. 다시 그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6면-금강산 표훈사.jpg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