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만다라

밀교신문   
입력 : 2018-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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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또 저렇게  앞만 보고 열심히 걷기만 하는 거 봐라. 산에 와서 그렇게 쌩하니 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구먼. 말 잘 듣게 생겨 가지고 영 딴판이네. 남의 말을 어디로 듣나 몰라. 나도 소싯적에는 그렇게 살아 봤는데 별 소득 없더라고요. 따라잡느라 숨넘어가는 줄 알았네.”

 

귀에 익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가끔 산에서 뵙는 어르신이다. 아까부터 뒤따라 왔는데 돌아보지도 않고 간다며 잔소리 같은 말투에 사람 냄새가 묻어난다.

 

저기 봐요. 고라니 새끼. 어른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안합디까. 어슬렁거리면서 이런 구경도 해야지 산에 온 보람이 있지요. 저 녀석은 가족을 잃어버린 건지 어미가 먹이를 구하러 간 건지 저기서 뽀시락 대며 늘 혼자 놀아요. 첨에는 인기척이 나면 나무 뒤에 숨더니 이젠 눈을 맞추어요. 내가 맘에 든 모양이야. 가느다란 다리며 엉덩짝의 흰점이 귀엽지요. 눈뭉치를 달고 다니는 것 같구먼. 어미가 잃어버리면 찾기 쉽게 점찍어 둔건가. 어릴 때 보면 우리 친구들도 저런 아이가 있었거든. 점식이라고. 점숙이도 있었지.”

 

산에 다닌 지 몇 년이 되었어도 새끼고라니는 처음 봤다. 혼자서 그림자놀이라도 하는지 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왔다 갔다 하며 신났다. 눈을 뗄 수가 없다. 남이 맡아 놓은 그림을 눈 빠지게 보려면 관람료라도 내야 하지 않느냐며 어르신이 장난스럽게 앞을 막아선다녀석이 우리가 하는 말을 들었나 보다. 값을 올려야겠다 싶었는지 슬그머니 시야에서 멀어진다. 어르신은 새끼고라니가 자기편이라며 손을 흔든다. 사소한 것에서 의미를 만드는 이야기꾼이다.

 

눈부처 만든 고라니가 아직 지워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정상이다. 어르신은 남의 집에 왔으니 인사부터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부처님께 예를 올린다. 나도 부처님 전에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바람과 햇살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땀을 말려주고 등을 토닥인다. 자는 듯 깨어 있는 듯 몸은 노곤하지만 정신은 맑다. 비워야 새 것이 들어올 자리가 있으리라. 이런저런 이유로 끌어안고 있던 것들이 한 숨 돌리고 보니 그럴 이유가 없어진다. 미련 없이 툭툭 털어낸다. 언제 또 주섬주섬 주워 담을지 모르지만.

어르신이 보여줄 게 있다며 따라오라고 하더니 산허리까지 내려온 현란한 단풍을 가리킨다.

 

화가가 그리다 만 그림이 기가 차지요. 웬만하면 마저 그리지. 게으름 피우는 건 아닐 터이고 아마도 물감이 모자라 사러 간 모양이네. 맨날 산에 오는 부지런한 사람들에게 선물처럼 보여 주려고 아끼면서 그리는지도 모르지. 완성된 것도 좋지만 그 과정을 보는 재미도 그만이거든이거 말고 더 이뿐 것 보여 줄까요?”

 

국화꽃 화분이 줄 서 있는 곳으로 안내한다. 노랑 빨강 보라 등 자태가 부처님을 닮았다. 나직한 키에 도토리만 한 작은 꽃이 오밀조밀하다. 산과 어우러져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자연스럽다. 이름표가 달린 건 부처님 전에 초청받은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초청해 줄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단다다 시들어 색이 바랜 국화꽃 앞에 선다. 어르신이 있는 돈 없는 돈 몽땅 털어 이름표를 달아준 화분이라고 한다.

 

하필 왜 곧 쓰레기통에 들어갈 것 같은 꽃을 택했느냐고 묻고 싶지요. 싱싱한 것은 시간이 많지만 이 꽃은 며칠 지나면 부처님 얼굴도 못 보고 생을 마쳐야 해요. 사람들이 시들은 꽃은 거들떠보지도 않거든. 그래서 내가 구해준 것이라오. 젊은 사람 눈에는 이런 꽃 보이지도 않지요? 눈길 주면 얼마든지 더 오래 살아 있을 수 있는 꽃이라는 것이 내 눈에는 보이거든. 그 눈길이 어떤 모습으로 바뀌는지 한번 봐요.”

 

마른 잎과 시든 꽃잎을 따내고 시원찮은 줄기를 꺾어 버린다. 화분의 먼지도 닦고 줄기 사이에 끼어 있는 낙엽도 치운다. 눈을 반짝이며 꽃을 매만지는 손길에 온기가 넘친다. 꽃은 몸집은 작아졌지만 인물이 달라졌다. 당당하게 이름표까지 달고 있으니 훤하다.

 

어르신은 이제부터 바쁘다며 갈 길을 재촉한다. 물감이 모자라 색칠 하다 만 그림쟁이한테 물감도 사줘야 하고 이름표 달아준 꽃값도 벌어야 하니 해 떨어지게 전에 내려가야 한단다. 장난 끼가 가득하다. 늙은이도 바쁠 때가 있다며 웃는 모습이 소년 같다. 흑백의 풍경에 색깔을 입히는 어르신은 사랑이 넘치는 재주꾼이다.

 

아랫사람에게 떡을 줄 수 있는 어른이 그저 되지는 않을 터. 어르신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백승분/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