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들여다보는 경전9-복을 짓다

밀교신문   
입력 : 2018-01-29  | 수정 : 201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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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복한 인생일수록 복을 지어야 합니다

불행하다는 말은 반갑지 않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고 싶으니까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불행하다는 말보다 더 반갑지 않은 말이 있습니다. 그건 ‘박복하다’입니다. 불행과 박복의 뜻이 얼마나 다른지는 쉽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박복하다는 말 속에는 인생의 최악이 느껴집니다.

불행하다면 열심히 노력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여지라도 느껴지지만, 박복한 인생은 먼지만한 행운도 누릴 여력이 없다는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경전을 읽다보면 대체로 복을 많이 쌓은 사람, 복을 많이 짓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만납니다. 풍요롭게 살면서 이웃에게 베풀고 승가에 기꺼이 공양 올리는 사람, 생계 걱정을 하지 않고 수행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심지어 엄청난 부자도 등장하는데, 이들은 스스로도 풍요로움을 누릴 줄 모르고, 남에게도 베풀 줄 모르다가 부처님과 수행자들을 만나 가르침을 듣고 개과천선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정말 박복한 인물을 드물게 만납니다. 가섭 존자가 만난 할머니가 그 주인공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난을 벗어본 적이 없고, 평생 이 집 저 집 떠돌아다니면서 품팔이로 근근이 연명해온 할머니입니다.

어찌나 가난한지 가족도 없습니다. 그러니 집이랄 것도 있을 리 만무입니다. 쓰레기 더미를 대충 파서 만든 굴을 집으로 삼고 있고, 언제부터 입었는 지 모를 넝마가 그녀가 가진 전부입니다. 찢어진 곳을 기울 실과 바늘조차도 없어서 헤지고 찢어진 대로 그냥 견디다보니 어느 사이 거의 반벌거숭이 차림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할머니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전염병 환자를 만난 것 보다 더 기겁을 하고 달아납니다.

그래도 힘이 있을 때는 밥이라도 빌어먹으러 다녔지만 이젠 나이 들어 그럴 기력조차도 없습니다. 쓰레기 굴 속에 누운 채로 몇 날 며칠을 견디다 보면 쓰레기를 버리러 온 사람들이 머리맡에 던져주고 가는 음식찌꺼기로 끼니를 때울 뿐입니다.

질기디 질긴 그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할머니는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쓰레기 더미 속에서 눈을 감았다 떴다 할 뿐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이런 자신이 처량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세상을 원망하며 온갖 악담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재산이 없는 건 그렇다 치고, 피붙이조차도 없는 신세입니다. 박복하다 박복하다 한들 이보다 더 할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박복한 인생을 저주하는 것도 다 젊은 시절의 호기입니다. 허리가 굽어지고 백발이 되도록 이렇게 살아오다보니 이제는 그저 지금 감기는 눈이 영원히 떠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를 며칠 전부터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가섭존자입니다. 그는 할머니의 수명이 며칠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평생 가난하게 살아온 할머니의 마지막 자리도 외롭고 쓸쓸할 것이 분명합니다. 가섭존자는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복을 지을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래서 할머니 귀에 들리도록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을 지으십시오. 복을 지으면 행복합니다. 이번 생도 행복하고 다음 생도 행복합니다.”
할머니는 이 말을 듣자 마음이 더 슬퍼졌습니다.
“복을 짓고 싶어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불행한 팔자입니다. 남에게 뭔가를 베풀고 싶어도 베풀 것이 없으니 이 얼마나 서글픈 인생입니까?”
가섭존자는 대답했습니다.
“베풀 게 없는 삶이 가난한 인생은 아닙니다. 베풀려는 마음만 있으면 그 사람은 이미 부자입니다. 자신이 지은 복이 없음을 알고 부끄러운 줄 알면 그는 이미 가사를 입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가섭존자의 말을 들은 할머니는 용기를 냈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부잣집 하인이 할머니 밥그릇에 부어주고 간 쌀뜨물이 생각났습니다. 쉰 냄새가 진동했지만 자신이 가진 것이라곤 그것뿐이요, 남에게 줄 것도 그것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스님, 이 쉰 쌀뜨물이 제게 있습니다. 이것이라도 받으시겠습니까?”
할머니는 머뭇머뭇 가섭존자에게 쉰내가 폴폴 풍기는 음식을 내밀었습니다. 존자는 공손히 합장하고 허리를 숙이고서 그 쉰 쌀뜨물을 자신의 발우에 받았습니다.
그 순간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지금 이 할머니 앞에서 이 음식을 먹어야 한다. 내가 다른 곳에 가지고 가면 할머니는 분명 내가 음식을 버릴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할머니는 더 큰 불행에 빠지게 된다.’
가섭 존자는 할머니 앞에서 천천히 발우를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들이마셨습니다. 쉰 냄새에 얼굴을 찡그릴 법도 한데 산해진미를 먹는 것처럼 아주 맛나게 쌀뜨물을 다 마시고 나서 그는 할머니에게 인사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이 음식이 할머니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지 잘 압니다. 세상에서 이런 귀한 보시를 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이 음식은 제게 힘을 주었습니다. 음식을 주신 것에 대한 보답으로 저는 열심히 수행하여 사람들에게 행복과 평온의 길을 알리는 데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할머니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쉰 쌀뜨물을 발우에 옮겨준 것뿐인데, 그런 할머니가 수행자에게 공양을, 보시를 했다는 것입니다. 평생 남에게 얻어먹으며 지내온 할머니입니다. 남의 집 대문 앞을 기웃거리다가 욕과 함께 날아오는 썩은 밥덩이를 눈물로 삼키며 세상을 저주하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남에게 베푼다? 그건 생각조차 해보지도 못했습니다. 할머니는 스스로를 ‘얻어먹을 팔자를 타고났지 남에게 나눠줄 팔자는 아니다’라며 여겨왔습니다. 박복하기 이를 데 없어 복을 짓기는 고사하고 까먹을 복조차도 없는 인생이라고 여기며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섭 존자는 그런 할머니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할머니가 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요. 누군가에게 도움을 줘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 인사를 받아본 적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차오르는 모습을 지켜본 가섭 존자는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참으로 커다란 복을 지으셨습니다. 할머니는 어떤 과보를 받고 싶습니까? 원하시는 대로 그리 될 것입니다.”

할머니는 합장을 하고 말했습니다.
“가난하게 태어나 밑바닥 인생으로 평생 살아왔습니다. 이 세속의 삶이 지긋지긋합니다. 다음 생에는 천상의 신으로 태어나 눈부시게 빛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가섭존자가 말했습니다.
“그리 될 것입니다. 할머니는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음식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베푼 뒤에는 커다란 기쁨을 일으켰고 원을 세웠습니다. 할머니의 바람처럼 될 것입니다.”

할머니는 가섭존자를 향해 합장하고 깊이 허리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삶을 마쳤습니다. 이 이야기는 <경율이상(經律異相)> 제13권에 등장하고, 또 <가섭존자가 가난한 할머니를 제도한 경(佛說摩訶迦葉度貧母經)>에도 나옵니다.

평생 자신의 박복함을 탓하며 살아오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단 한 번 복을 지은 할머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첫째, 복을 지으려 해도 지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복을 짓겠다고 마음을 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복을 짓는 일을 남이 대신 할 수 없습니다.

둘째, 남에게 베푸는 재물의 규모보다 남에게 베풀겠다고 마음을 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가난이란 재물의 유무나 재산의 과다가 아니라 남에게 베풀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는 것을 경전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강조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지금 누군가에게 뭔가를 베풀 마음을 내었다면 당신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고 경에서는 말합니다.

셋째, 하지만 아무리 베풀 마음을 내었다 해도 지금 무일푼이라면 그래도 복을 지을 기회는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선업을 짓고 복을 지을 때 기뻐해주는 일입니다. 함께 기뻐해주는 일, 한문으로는 수희(隨喜)라고 합니다. 얼마 전 스리랑카의 한 사찰에 갔을 때 마을 사람들이 부처님 사리탑에 공양물을 올리는데 주변 사람들이 그 공양물에 두 손을 갖다 대고 머리를 조아리며 합장을 했습니다. 비록 자신의 공양물은 아니지만 함께 공양에 참여한다는 몸짓이었습니다. 다른 이가 복을 짓고 선업을 지을 때 기뻐해주는 일, 이 역시 우리가 짓는 복입니다.

이런 복마저 지을 수 없을 때 박복하다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세상에 박복한 이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복을 지어 행복하고, 남이 복 짓는 모습에 기뻐해서 더 행복한 것, 이것이 불교입니다.

9. 가섭과 가난한 할머니.jpg

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