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제 정사 알기쉬운 교리문답 51

편집부   
입력 : 2017-05-31  | 수정 : 2017-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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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체와 마음은 어떤 관계에 있나요?

인도에 탄생하셔서 2,500 여 년 전에 숨을 거두셨던 화신 석가모니 부처님은 육신으로서의 형체를 갖추어 살다가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진언행자들이 신앙하는 진정한 부처님, 즉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은 형체가 없습니다. 길지도 짧지도 않고, 그렇다고 일정하게 정해진 어떠한 색깔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상황에 따라 각각의 색깔을 나타낼 뿐이지요. 그래서 법신부처님은 형체가 정해져 있지 않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가 무슨 형체가 있고 색깔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이것을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가르칩니다. ‘색상현실(色相現實)’은 ‘공(空)’한 이치와 같고, ‘공’한 그 이치는 그 자체로 ‘색상현실’과 다르지 않다는 거지요. 마치 수증기 속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물이 될 성분이 가득 차 있지만, 물이 될 인연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것이 마치 공한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좀 더 쉬운 비유를 들자면, 하늘은 특별한 모양을 갖추고 있지 않지요? 하지만 엄연히 하늘은 존재합니다. 형태가 없지만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늘의 무상성(無相性)’이라고 우리는 얘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인생도 무슨 특별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각자의 인생을 두고 정치가의 인생, 과학자의 인생, 연예인의 인생……. 뭐 이렇게들 흔히 얘기합니다만, 사실은 인생이란 게 이렇게 형태 지워서 거론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치 하늘이 형태 지워질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닌 것이듯 말이지요.

《금강경》에 ‘모양이 없는 진리를 보게 되면 진정한 여래를 보게 된다.’〔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는 말씀이 있습니다. 문화재 중에도 유형문화재가 있고 무형문화재가 있는데 우리는 유형, 즉 형체 있는 것만이 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를테면 이름이나 명칭, 명분 같은 것에 집착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간혹 ‘불교는 종교인가? 아니면 철학인가?’라는 질문을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어떻게 정의를 내리든지 그러한 명칭이 중요한 건 아니에요. 백합이라는 꽃에 진달래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백합에서 진달래 향기가 나는 건 아니듯이 말이지요. 

서산대사가 지은 《선가귀감》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맑고 신령하여,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마음이 바로 그런 것이지요. 우리들 마음이라는 본체가 움직이지 않으면 현상도 고요해집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본체는 요란을 떨면서도 형체는 그대로 둔 채 그림자만 없애려고 부산을 떨기 일쑤잖아요.

이름 붙이기에 급급하고 불교네, 기독교네 서로 다른 종단 간에 비방을 일삼는 우리들……. 한번쯤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기독교적인 것도, 불교적인 것도 아닙니다. 다만 어머니의 숭고한 사랑일 뿐이지요. 형체가 없는 마음으로서의 행복은 쉽게 찾아내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