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제 정사 알기쉬운 교리문답 42

편집부   
입력 : 2017-01-26  | 수정 : 2017-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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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아는 것이 바른 앎일까요?

‘내가 안다’라고 하는 한 생각 알음알이를 불교용어로는 ‘식(識)’이라고 합니다. 식이 부족하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반대로 식이 넘치면 교만하다는 비난을 받게 마련이지요. 만약 후자의 입장에 있다면 우선 ‘내가 안다면 얼마나 알겠는가’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살피고 돌아보세요.

어느 중학교 생물 시험에 아주 까다로운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네 마리 새의 다리와 발 모양을 보고 괄호 안에 각각의 새 이름을 적어 넣는 문제였지요. 학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마음속으로 ‘뭐 이런 문제가 다 있지?’하는 생각이었지만, 아무도 선뜻 불만을 토로하지 못했습니다.

적막함이 흐르던 그 순간, 시험 감독으로 앉아있던 생물선생님 앞에서 보란 듯이 시험지를 교실 바닥에 내던지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갑자기 벌어진 일에 어이가 없다는 듯 분노하며 소리쳐 물었어요.

“요 놈 봐라! 너 임마, 이름이 뭐야?”
이에 가던 발걸음을 돌려 칠판 앞에 선 학생, 갑자기 종아리를 둥둥 걷어 올리고는 씩씩거리며 하는 말이,
“맞춰보세욧!”
새 다리를 보고 새 이름을 맞추는 일이야 조금 어렵더라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사람의 다리를 보고 그 사람의 이름을 맞출 수 있습니까? 없지요? 이것이 바로 대상을 분별하여 아는 ‘분별지(分別智)’의 한계라고 할 수 있어요. ‘안다’는 착각을 과감히 떨치고 나와야만 비로소 감춰진 진실이 보이는 법이지요.
어린 시절, 지구상의 바다와 육지의 비율은 대략 7:3이라고 배웠잖아요? 하지만 어느 순간 과연 그럴까 하는 의심이 들더군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땅을 계속 파 들어가면 결국에는 지하수가 나오지 않습니까. 반대로 바다 속을 깊이 내려가면 결국에는 땅에 도달하게 되거든요. 한마디로 수즉시지, 지즉시수(水卽是地, 地卽是水)인 겁니다. 

그러니 이 7:3이라는 비율은, 사실은 지표면이 촬영된 인공위성 사진을 보고 ‘파란 건 바다, 노란 건 땅’이라는 식으로 육안이 감별한 수준의 비율이라고 볼 수 있어요. 수박겉핥기 식의 이러한 표면적 지식은 단지 껍데기에 불과한 거예요. 정작 중요한 것은 내부에 존재하는 그 무엇까지도 간파할 수 있는 입체적 지식인 겁니다. 이러한 지식은 분별지의 제한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하며, 깊은 통찰력으로 단숨에 알아차리기 때문에 직관지(直觀知)라고도 하는 거지요. ‘지식’과 ‘지혜’가 다른 이유입니다. 

“신구의(身口意)의 삼밀로써 수행하여 가는 것은 몸과 마음 양면(兩面)으로 전인격적(全人格的) 활동(活動)이라. 그 진리(眞理)를 지성(知性)이나 평면(平面)으로 사유(思惟) 않고 전인적(全人的)과 입체(立體)로서 긍정(肯定)함이 삼밀(三密)이라. 그러므로 삼밀행은 행자자기확립(行者自己確立)이라.”(‘삼밀은 전인적인 수행’, 진각교전 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