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11

편집부   
입력 : 2013-08-05  | 수정 : 201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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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양(一陽)이 중음(衆陰)을 이기다"


"많은 진언을 다 염송하게 되면 도리어 묘력(妙力)이 미약할 뿐이다. 현대는 본심을 요구할 때이므로 육자본심진언을 전용(專用)하는 것이다. 일양(一陽)이 중음(衆陰)을 이기는 격이다."('실행론' 제1편 제3장 제7절 가)

"범이 오면 잔짐승이 없어지고 범이 가면 잔짐승이 모여든다. 육자대명왕진언도 그와 같다. 진언 속에는 부처님의 참뜻이 들어 있다. 오탁악세 허망한 세계에는 본심진언이라야 한다. 이성(理性)과 지성(智性)을 여는 육자심인(六字心印) '옴마니반메훔'이 본심진언이다."('실행론' 제1편 제3장 제7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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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도원 정사



(콩트)선택과 집중


"아빠, 미얀마 갔다오신 사진 보여주세요."

미얀마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큰딸 미혜가 미얀마는 어떤 나라냐고 물으면서 궁금증을 참지 못해 사진부터 보여달라고 난리였다.

"사진 없는데……."

진이는 난감했다. 딱히 보여줄 사진이 없었다. 세미나 참석 차 미얀마로 갔던 출장이라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기 하루 전 바간을 찾은 것이 전부였다. 진이는 그것도 과분했던 사람처럼 다른 일행들과 달리 하나의 탑에서 하루 종일 머물렀다. 일행들과는 저녁시간에 맞춰 숙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무리에서 떨어졌던 터라 여러 곳을 둘러보며 찍은 사진이 있을 리 만무했다.

"에이 시시해. 아빠는 우리 생각은 하나도 안 하나봐."

미혜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이내 시무룩해 했다. 진이는 마지못해 미앵꼬파고다라고 하는 하나의 탑에 머물면서 다른 각도로 오르내리다가 찍은 몇 장의 사진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아빠 너무 해."

미혜는 이번에도 중얼중얼하면서 꺼내 놓은 선물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소파에서 일어서려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사진 대신 아빠가 이야기를 해줄게. 아빠가 여러 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어오지 못했던 것은 한 곳에서 넋을 잃었기 때문이야. 미혜가 이해 좀 해줘라. 응…….

"아빠, 지금은 괜찮아요?"

초등학교 3학년인 미혜가 '넋'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잃었다'고 한 말에 그만 '정신 줄을 놓고 헤맸다'는 것으로 받아들인 듯 놀라서 되물었다.

"괜찮아. 생각이 많아서 한 곳에 정신을 팔아버린 거야. 미얀마는 사진보다 마음의 눈으로 보고, 가슴에 담아오는 것이 더 필요하겠다는 게 아빠의 생각이었어. 그래서 일행들을 따라 다니지 않고 아빠 혼자 한 곳에서 오래오래 있으면서 생각을 많이 했단다. 미혜 생각도 하고……."

그제야 미혜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면서 이야기를 해보라는 투로 눈을 반짝 뜨고 귀를 쫑긋 세웠다.

탑림.

미얀마 바간에 발을 딛는 순간 진이는 말문이 막혔다. 광대한 탑열이 눈에 들어오면서 숨까지 막히는 듯 했다. 벅찬 감동과 흥분,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부담감이 교차하면서 할 말을 잃은 것이다.

신라천년의 고도 경주에는 계림이 있다. 신라시대 탈해왕 때부터 한동안 불렀던 다른 이름이기도 하고, 경주의 또 다른 애칭이자 예전 우리나라를 달리 일러서 말하기도 하는 지명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첨성대와 반월성 사이에 있는 숲을 이르는 말이다. 계림과 더불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왕릉군은 수학여행을 갔던 중학생 진이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진이는 미얀마의 탑열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그 계림을 떠올렸다. 구이린이라 하는 계림은 중국에도 있는 지명이기도 하다. 중국 광시장족자치구 북동부에 있는 도시로, 교역과 문화중심지다. 하지만 계림처럼 중국하면 진이의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 것은 시안의 비림이다. 진이는 계림이나 비림처럼 탑으로 숲을 이룬 '황금의 땅' 미얀마 바간이야말로 탑림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유레카! 진이는 한참 후에야 가슴을 펴며 긴 숨을 내쉬었다. 두 팔은 자연스레 위로 치켜올려졌다. 한동안 먹먹하던 머릿속이 빛 한 줄기를 만난 것처럼 맑아지며 가슴도 뻥 뚫리는 듯 했다. 순간적으로 멎었던 몸 속의 피도 다시 도는 기분이었다. 신열을 앓고 난 뒤처럼 전신에서는 식은땀이 흥건하게 솟아나기까지 했다. '일은 찰나'라고 해서였던지 그때 마침 불어온 바람 한 줄기의 시원함은 탑림이 주는 선물이었다.

1천년 전에는 4천여 기의 탑(파고다)이 있었다고 했다. 몽골과 영국 등의 식민지 시절 겪은 반달리즘과 대지진 등 저간의 나라 안팎 사정과 이러저러한 까닭으로 일부 빛을 바래기는 했지만, 지금도 2천500여 기에 달하는 탑이 즐비한 바간의 전망대 역할을 하는 미앵꼬파고다에서 사방을 휘둘러본 거대한 '탑림'은 한 순간에 숨이 멎을 정도로 전신을 감전시켰다. 찬란했을 과거의 자취가 부처님의 법문처럼 다가서고, 오늘에 이어 영원으로 이어질 미래를 향한 숨결이 부처님의 음성이자 설법으로 들려왔다. 미앵꼬파고다가 진이를 향해 장광설을 토했던 것이다.

"탑이라도 여러 개를 찍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혜가 실망한 것처럼 눈을 내리 깔면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을 잘랐다. 미혜는 어떠한 이야기보다는 여러 개의 탑이며 다양한 사진을 더 보고 싶어하는 듯했다.

"사진 찍고 돌아서고, 또 사진 찍고 돌아서고 하면서 여러 곳을 한꺼번에 둘러보았다면 아빠가 이런 좋은 이야기를 해주지 못했을 거야. 한 곳에 머물며, 우리 미혜 생각도 하면서, 오래 있었으니까 미혜에게 해줄 이야기도 많은 거야. 그리고 무엇이든지 단순하게 보고 듣는 것은 그 순간만 지나면 잊어버리고 마는 거야. 이해를 하고 마음으로 느끼며 몸으로 부딪혀봐야 자기공부가 되어 오래오래 기억할 수도 있고, 재미있게 이야기도 해줄 수 있는 거야. 공부도 마찬가지지 않니? 선생님께서 가르쳐 줄 때는 아는 듯 했지만 막상 스스로 문제를 풀어보려면 잘 안 될 때가 있지? 선생님께 배운 대로 문제를 스스로 풀어보면서 손으로 익혀야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

"그리고 어떤 곳이라도 여행하면서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보고 올 수는 없는 거란다. 다음에 와서 보겠다는 인연을 지어 놓아야 또 그곳으로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법이란다."

"그럼 아빠는 이번에 미얀마 가서는 탑 한 개를 본 것이지만 봐야할 것은 모두 다 보았다는 말이네요."

"아! 우리 미혜 대단하네. 바로 그거란다. 아빠가 비록 이번에는 한 개의 탑을 보았지만, 아빠 생각에 이번 기회, 그곳에서는 그 하나가 2천500여 기의 탑 모두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아빠가 보아야할 것은 모두 다 보고 온 셈이다 이 말이지."

"치……. 아빠 흥분하시는 거 좀 보세요 어머니……."

진이의 아내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을 삼키고 있었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