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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곳에 물들지 아니하고…

편집부   
입력 : 2013-08-05  | 수정 : 201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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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헌(鳴玉軒)에 왔습니다. 한창 화사하게 피어나는 배롱나무 꽃을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배롱나무. 백일동안 핀다고 흔히 '목백일홍'이라고 하고, 껍질 벗은 가지를 손으로 간지럽히면 가지가 떨려 '간지럼나무' 또는 '자미화'라고도 한다지요. 수형은 노송처럼 구부러지고 휘어졌으며 수피는 벌거벗은 것처럼 맨살입니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사랑채 주변에는 심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실 굳이 명옥헌까지 가지 않더라도 배롱나무 꽃을 볼 수 있는 곳은 많습니다. 전라남도 담양까지의 거리가 결코 가까운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한동안 곤비한 일상에 복무하다보니 잠시 마음 한 자락을 열어놓고 싶었습니다. 여름 전라도 여행의 즐거움은 눈 닿는 곳마다 흐드러진 배롱나무 꽃을 보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근사한 수형이며 꽃빛깔이 아름답기론 명옥헌 원림에 있는 배롱나무였습니다. 연못 한가운데 있는 배롱나무를 비롯해 명옥헌 주변을 온통 휘감고 있는 꽃들을 보고 있으니 마음까지도 꽃물이 드는 것 같습니다. 꽃물 드는 마음, 이거 하나면 또 한동안 쓸쓸한 일상을 견뎌낼 수 있겠지요.

그러다 문득 떠오른 단어 '불염거'(不染居)에 무릎이 꺾이는 듯 했습니다. '있는 곳에 물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붉은 후지산'을 그린 일본 채색판화의 대가 가츠시카 호쿠사이(1760∼1849)의 아호입니다. 평생 아흔 세 번이나 이사하며 살았다하니 그 끊임없는 여정이 멀미가 날 정도입니다. 아마도 그는 끝끝내 자신의 삶을 뛰어넘고 싶었겠지요. 그것이 예술가의 삶이니까요. 불염거라니,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살 수 있는 삶이라니…. 저는 다만 낯설음에 물들지 않고 익숙함에도 물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것은 담양에 오기 전 지나쳐온 제 고향 마을에서 느꼈던 낯설음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곳에 가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국도를 달리다보니 배롱나무 물결은 끝이 없었고 저는 내릴 곳을 잊은 채 꽃물결에 빠져 있었습니다. 시간이 하염없이 지나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광주에서 장흥으로 이어진 도로 주변은 거의 변한 게 없어 보였습니다. 제가 당황한 것은 장흥 군내버스를 타고 장흥댐 주변으로 들어섰을 때였습니다. 댐 주변을 휘감고 흐르는 도로 덕분에 그곳은 아주 멋진 드라이브 코스가 되어 있었습니다. 시실 예전에 비하면 차로 접근하기도 편해지고 풍광도 더 수려해지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뿐이지요. 제 태생지였던 그 곳은 이제 그저 낯선 풍경, 낯선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일 뿐입니다. 그나마 산 아래였기에 남아있는 집터마저도 얼마나 낯설어 보이던지. 그 낯설음에 물들어 시간을 보내는 마음이 얼마나 스산했는지 겨우 하루만에 고향을 떠나왔습니다. 차라리 그리워하며 사는 게 나았을 겁니다. 그리워할 게 많다는 것은 어쩌면 또 다른 마음의 자산이기도 할 테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왠지 느꺼워집니다.

다시 불염거를 생각합니다. 이제는 원래의 뜻 그대로.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내 빛깔, 내 목소리로 그러면서 또한 조화롭게. 꽃들이 향기를 섞지 않는 것처럼. 따로 또 같이 또한 향기롭게. 명옥헌의 여름이 깊어갑니다. 명옥헌에 앉아 듣는 시냇물 소리 한동안 귓가에 아련하겠지요. 제가 간직해야 할 그리움의 자산으로 명옥헌을 추가합니다. 꽃물 든 마음으로 천천히 명옥헌을 내려가야겠습니다.

김혜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