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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대로 여기에

밀교신문   
입력 : 2024-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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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직접 경험해보기 전까진 알 수 없다. "남이 하는 일이 쉬워 보인다면 그 사람이 잘하고 있기 때문이다"는 말처럼, 몸소 겪어 보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보일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고 노력했는지 모른 채 판단 내리기 쉽다. 주말 동안 연기 수업을 들었다. 다소 가벼운 마음과 얕은 흥미로 신청한 수업이다.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편이다. 자극적인 사건들이 각인되어 내 일상에 쉽게 침범해서다. 같이 울고 웃으며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는 동안 시청자의 에너지 소모도 만만치 않다.

 

취미 수준의 수업이었지만, 내가 배운 것은 재벌 흉내를 내며 혼자거들먹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상대의 감정에 반응하고 내 호흡을 살피며 반복해서 관찰하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서로의 역할에 의존하며 하나의 장면을 완성했다. 한국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유명 드라마 대본을 분석하고 연습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아주 짧은 장면이라 고작 대여섯 줄 대사가 전부였지만, 대사 전후의 감정 변화와 대사의 의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어디에 변화를 줘서 강조해야 하는지 면밀하게 분석하는 시간에 온 감각을 키웠다. 드라마를 볼 때는 몰랐지만, 대사를 반복적으로 듣다 보니 들을수록 새로웠다. 읊조리듯 말하는 순간에도 들리는 또박또박한 대사, 인물관계의 긴장감을 풀어주는 헛기침, 공간을 호흡으로 채우는 순간도 모두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말의 높낮이, 억양, 호흡으로 이루어진 대사는 꼭 가사처럼 그 나름의 운율을 조화롭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연기를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처음엔 체면때문에 일정 이상의 소리를 키우는 것도 주저했지만, ‘를 없앨수록 역할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무수히 많은 감정과 인물이 얽히고설키다 우리를 향한 카메라가 꺼지는 순간 연기처럼 흩어졌다. 상상 속에 존재했던 배경 무대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내가 연기한 인물조차 실체가 없어졌다. 불교에서 연기즉무아라는 말처럼 나의 연기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내가 만들어낸 나도 사라졌다. 허망하지만 개운했다. 구속받지 않고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모든 감각을 허용했다.

 

우리 인생은 드라마처럼 수정을 거듭한 완벽한 대본도 없고, 마음에 안 드는 장면을 도려내서 편집할 수도 없다. 물론 마음에 드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도전할 기회 조차 없다. TV 속 연기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섬세해서 어려웠지만, TV 밖 생활 연기로 살아가는 것도 만만치 않다. 감독이나 작가도 없어서 완성도도 떨어질뿐더러, 내가 주인공인지 조연인지 가끔 의심이 가는 순간도 종종 발생한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환기가 되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드라마를 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나의 존재를 받아들일 것 같다. 연기법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지금 이대로 여기에만 존재하도록. 우리 모두 되감기 없는 드라마를 만들어 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양유진/글러벌 서비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