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사설

주필 기명칼럼 수미산정(470호)

편집부   
입력 : 2007-05-17  | 수정 : 2007-05-17
+ -

 

회당대종사의 '참회정신' 되새기자
                 
5월 16일은 진각종을 입교 개종하신 진각성존 회당 대종사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대각절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인간의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어 비로소 불교가 시작되었듯이 진각종의 시작은 바로 회당 대종사의 깨달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진각성존께서는 어떻게, 무엇을 깨달으셨는가. 석가모니부처님이 우주 연기법에 대한 의문을 고행과 명상을 통해 풀어내고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하신 것처럼, 진각성존께서는 육자진언 수행을 통해 우주의 큰 진리를 성취하셨다. 회당 대종사의 깨달음을 위한 수행방법은 오늘의 진각종단의 수행법이고, 깨달음을 통해 설파하신 법문들은 진각종의 종요, 종지이며, 종풍이기도 하다.

60여 년 전 회당 대종사께서 깨달은 직후 대중들을 향해 일갈하신 법문의 요체는 '참회정신'이었다. 참회하라는 것이었다. 가까이는 금생에 지은 여러 가지 허물들부터, 멀리는 무시광대 겁으로부터 지어 모은 수미산과 같은 업보를 다 드러내어 참회하라는 것이었다. 육자진언은 참회의 도구이다. 육자진언 염송을 통해 내 잘못은 물론 상대자의 허물까지 내 허물로 보는 참회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종조께서는 '은혜는 평생으로 잊지 말고 수원은 일시라도 두지 말라'고도 하셨다. 인간의 삶이 고해인 것인 수원심이 엉켜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풀리지 않는 것은 참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는 상호 업연에 의해 인연을 맺고 있는 존재이므로, 상대의 허물의 원인은 나에게도 없지 않은 것이다. 상대의 허물만을 타박하고, 인정하지 않는 자세로는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어가기 어렵다. 초기 진각종단에 있어 많은 진언행자들이 소위 대중들 앞에 '발로참회'를 하여 인과관계를 풀고, 고질화된 병고해탈은 물론, 많은 서원을 성취했던 종풍이 오늘에 계승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종단의 신행이 형식화되었다는 것이다. 참회의 종풍을 다시 진작시키기 위해서는 승단부터 수범을 보여야 한다. 진각성존의 제자된 도리로 그 핵심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바른 사제들이라고 할 수 없다. 불화의 자리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사필귀정으로 드러나게 되어있다.

 

자비복지의 등을 밝히자

봉축의 물결이 거리를 장엄하고 있다. 봉축불사의 전통은 연등을 밝히는 일이지만, 연등을 밝히는 그 의미는 사바세계의 무명을 지혜로 밝히려는 원력의 상징이다. 그런데 정작 지혜를 밝히려는 본래의 의미는 간과된 채, 봉축행사의 대부분은 연등불사에 집중되어 있다. 탐심과 번뇌로 아무리 화려한 오색연등을 밝힌다 한들 인과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어두운 마음이라면 탐진치의 업보만을 더 지을 뿐이다.

이왕에 지혜를 밝히려는 방편으로 봉행되는 연등불사라면 개인의 서원을 앞세우는 '서원등'이나 '선망조상등'과 함께 '자비복지의 등'을 하나 더 달기를다. 진각종단은 복지종단이라 불릴만큼 복지불사가 활성화된 종단이지만, 복지가 사회복지사들만의 소명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시민과 불자들이 자원봉사나 후원의 원력으로 동참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봉축불사는 복짓는 불사여야 한다. 현교에서 아기부처님을 관욕하는 것은 부처님의 오심을 찬탄하는 의미뿐 아니라, 병들고 가난한 이의 몸을 씻겨주는 봉사의 의미가 있다. 부처님의 오신 의미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사찰만의 잔치, 불자들만의 풍요를 구가하는 봉축이어서는 곤란하고, 나눔과 베품의 회향절차가 있어야 한다. 자비복지의 나눔의 등공양과 더불어 법당에 찾아올 수 없는 복지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는 봉축의 행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앉아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으신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 법문을 들려주시었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향해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가는 나눔의 봉축, 찾아가는 봉축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