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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겨울의 끝

밀교신문   
입력 : 202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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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쾌한 미세먼지와 찬바람 겨울을 피해 부모님을 모시고 장거리 비행을 떠났다. 길거리에 나온 사람보다 들판에 풀린 양이 더 많은 곳, 변덕스러운 날씨로 일기예보가 소용없는 곳, 우리나라 계절과 정반대인 뉴질랜드에서 10박을 보내며 추운 겨울의 끝에 따스함을 묻혔다. 부모님과 떠나는 해외여행은 끊임없는 트로트 행진곡과 함께 477km를 달려야 하는 점 빼고는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놀랍도록 비슷한 식성과 습관을 여행 도중에 발견할 때면 나는 영락없이 엄마, 아빠 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흔히들 여행은 나를 찾는 과정이라고 하지만, 부모님과 함께하는 여행은 다르다. 부모님의 행동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재미가 여행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어딜가나 물건부터 정리하는 습관은 아빠한테 물려받았구나’, ‘입국심사를 마치자마자 운동화에서 실내 슬리퍼로 갈아 신는 엄마를 보니 철저한 준비성은 엄마를 닮았구나.’ 평상시에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상대방의 작은 행동이나 버릇 속에 숨은 나를 마주하게 된다. 숨은그림찾기처럼 하나씩 연결고리를 찾을 때마다 서로를 이해하는 접착제가 되어 관계가 더욱 단단해진다.

 

집에서 보던 엄마의 모습과 여행지에서 본 엄마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부엌에서 밥 차리느라 정신없던 엄마는 여행지에서는 잔뜩 신바람 난 소녀의 모습이었다. 늘 굳은 표정으로 늦은 시간에 힘없이 들어오던 아빠의 모습도 사라지고 KFC 할아버지 광고처럼 인자한 표정으로 바뀌어있다. 장소가 바뀌니 대화 주제도 달라진다. 어딜 가나 두 손을 꼭 잡고 다니시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자꾸만 보고 싶어 눈길이 간다. ‘이렇게 좀 해라, 이것밖에 못 하냐?’ 서로를 향한 비난과 잔소리 대신 이것도 해보자, 저 길로 가보자설렘 가득한 제안으로 바뀐다. 척하면 척 맞장구치는 모습이 20대처럼 젊고 들떠 보인다. 짓궂은 날씨로 세찬 바람 소리가 밤잠을 방해해도 아빠가 있어서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엄마를 보며 결혼 후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이 이런 것이구나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여행 중 가장 좋은 순간을 꼽으라면, 눈부신 에메랄드빛 호수 앞에서 싱싱한 연어를 먹을 때도, 장엄한 자연 앞에서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나무 위에 누워 있을 때도, 푸른 하늘과 굴곡진 산맥을 앞에 두고 가족끼리 온천을 했을 때도 아니다. 별이 쏟아지는 낯선 밤거리를 서로서로 의지하며 엄마, 아빠와 나란히 걸은 순간이다. 별거 아니지만 이것조차 여행이 아니라면 흔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니. 무엇이 일상을 그렇게 바쁘게 만든 걸까? 나란히 걷고 있는 이 길이 영원히 끝나질 않길,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그대로 이어지길 반짝이는 달님에게 빌었다

 

양유진/글로벌 서비스 콘텐츠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