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를 만난 사람, 붓다가 만난 사람-일곱 번째 인물

밀교신문   
입력 : 2023-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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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가 만난 노인-사문유관에서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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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보로부드르 서면 남쪽 부조의 한 장면. 가운데에 수레를 타고 있는 태자의 모습이 있고 왼쪽 끝에 볼품없고 마른 노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사진 김용섭>

 

앞서 소개한 인물은 부처님이 만난 인연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부처님이 되기 이전 싯다르타 태자이던 시절, 태자가 만난 결정적인 인물을 소개하려 합니다.

 

부처님 일생에서 사문유관은 큰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사문유관은 동남서북 사대문(四門)으로 나아가 세상을 유람()하며 두루두루 관찰()한다는 뜻이지요. 궁중 안에서 호화롭고 행복하게만 지내던 청년 싯다르타에게 삶은 내 맘대로 다 이뤄지고 온통 분홍빛이며 생기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꿈같은 시간을 보내던 한 사람(태자)에게 현실을 직면하고 인생의 실제 모습을 목격하는 사건이 찾아옵니다. 화려하고 풍요롭고 향락이 넘치는 궁중이 아닌 인간이 사는 거리에서 실존을 대면하게 된 것이지요.

 

그 실존이란 바로 인생이란 늙고 병들고 죽음이 이어지는 과정이란 사실입니다. 이론으로, 책으로 익히는 것이 아닌, 인간의 거리로 나가서 자신의 두 눈으로 목격한 것입니다.

 

사문유관에서 가장 먼저 동문으로 나간 태자가 만난 인간의 실존은 늙음입니다. 그런데 그 늙은이의 모습은 기력이 넘치고 주도적으로 인생을 살아나가는 오늘날의 노인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부처님 일대기를 드라마틱하게 설명하고 있는 <불설보요경>에서는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 때 보살(싯다르타 태자)이 동쪽 성문으로 나아갔는데 (중략) 머리는 희고 이는 빠지고 눈은 어둡고 귀는 먹었으며, 숨을 가쁘게 쉬며 신음을 하면서 지팡이를 짚고 허리를 굽혀 걷다가 길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아들이 행여 출가수행의 길로 들어설까봐 부왕인 정반왕은 태자의 궁중에 젊고 생기 넘치고 아름답고 건장한 이들로만 가득 채웠다고 하지요. 그러니 이런 노인의 모습은 낯설기 짝이 없었고 어쩌면 소름끼치고 두려움을 안겨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싯다르타 태자가 마부에게 깜짝 놀라 대체 이 사람은 왜 이런가?”라고 물었고 마부의 대답은 무척 충격적입니다.

 

이 사람은 노인이라 합니다. 모습이 이미 다하여 형상이 변하고 빛깔이 쇠미하여 음식은 소화가 되지 않고 기력은 쇠약하며 목숨은 서쪽에 걸려 있고 남은 수명도 얼마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노인이라 합니다. 이 사람만 늙는 게 아닙니다. 온 세상이 다 이렇게 됩니다. 이게 세상의 당연한 이치이지요.”

 

경전에서는 태자가 알면서도 마부에게 짐짓 물었다고 합니다. 장차 부처가 되실 분이 늙음이란 것을 모를 리가 없겠지요. 다만 이 묻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혹시 당신도 궁중 속 태자처럼 늙음이란 것이 남의 일이요, 나는 절대로 힘이 빠져서 덜덜 떨며 지팡이에 의지한 채 젊은이들의 멸시와 냉대를 받게 되지는 않으리라고 믿고 있는 건 아닌지를 확인합니다.

 

같은 에피소드를 초기경전인 <디가 니까야>(14. 대전기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노인을 보았는데, 그는 허리가 꼬부라질 대로 꼬부라졌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고, 병들었고, 젊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추레하고 비참한 모습에 놀란 태자에게 마부는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이 사람은 늙어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늙었다고 말합니다.”

 

마부의 설명을 듣고 태자는 소름이 끼쳐 이렇게 묻지요.

 

나도 필경엔 늙을 것이란 말인가? 이 늙음을 건너 뛸 수는 없겠는가?”

 

마부는 심드렁하게 대답합니다.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삶의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태자님도 저도 결국 이렇게 늙을 것이고, 이 늙음을 뛰어넘을 자는 없습니다.”

 

<디가 니까야>에서 노인을 만난 태자는 싯다르타가 아닌, 과거 일곱 부처님 가운데 첫 번째 부처님인 위빳시(비바시)입니다. 다만, 과거 일곱 부처님이 모두 이런 경험을 한다고 하였으니 싯다르타 태자(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다시 <불설 보요경>으로 돌아와 볼까요?

 

마부의 설명을 듣고서 싯다르타 태자는 깊이 탄식합니다.

 

, 이게 인생이로구나. 인생에는 이런 위험이 있고 모두가 이런 늙음을 겪는다는 말이로구나. 깊은 산속 계곡 물이 맹렬하게 흘러가 버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 목숨도 그처럼 흘러가버리는구나.’

 

태자의 생각은 이어집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에게는 이런 늙음이 닥치리라 생각하지 못하고 잘난 체 하겠지. 그러면서 온갖 쾌락에 빠지고 즐거움을 찾아다니며 인생을 보내겠지. 저 늙음이 바로 지금의 내 미래 모습인 줄 이제 깨달았으니 참으로 삶이란 것이 허깨비 같고 번개와 같구나.’

 

자주 상상합니다. 가게에서 점원이 설명해줘도 귀가 어두워서 뭐라고? 뭐라고?” 하며 고함을 치는 노인, 전철에 오르면 앉을 자리 찾아 사람들을 밀치고 통로를 지나는 노인, 몸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어르신, 그냥 그 연세엔 그러려니 하세요.’라는 말만 들려줄 뿐 어떤 처방전도 더 이상 내주지 않아 불안하고 황망해진 노인, 걷는 모습은 이미 흐트러져 있고 외부의 작은 힘에도 주춤거리고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노인.

 

늙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글자로 만나는 늙음이 아닌, 거리에서 마주치는 늙음은 통렬합니다. 이런 늙음이 어찌 사랑스럽겠습니까. 사람들은 늙음을 애써 실버그레이니 하며 아름답게 포장하려 하지만, 그런 행위 자체가 늙음을 그 자체로 직면하지 않으려는 눈물겨운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지닌 데다 청춘마저 지니고 있던 싯다르타 태자에게 늙음은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을 테지요. 하지만 사문유관을 통해 가장 먼저 그가 만난 것은 나도 늙는다. 내가 바로 저 늙은이의 모습을 띨 것이다라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미령/불교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