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처와 제보살과 중생들의 본심(本心)

밀교신문   
입력 : 2019-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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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은 비로자나불, 마는 아축불, 니는 보생불, 반은 아미타불, 메는 불공성취불, 훔은 금강보살. 이 육자(六字)의 다라니(陀羅尼)는 부처와 및 제보살(諸菩薩)과 중생(衆生)들의 본심(本心)이라.”
 
본심은 곧 불심(佛心)입니다. 불심은 비로자나불의 마음입니다. 비로자나불의 마음은 본래 이름도 모양도 없어 보이지 않지만, 중생계에서는 억지로 부처라 이름하며, 성격을 청정이라 하는 것입니다. 밀교에서는 우주 법계가 본래 청정 본심이므로 비로자나불을 주인공으로 표기하며, 작용으로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식(識)으로 나누어 육대법신(六大法身)이라 합니다. 청정의 본심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공능(功能)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정성이 가진 공능 가운데 단단한 마음은 땅이 되고, 습기(濕氣)의 마음은 물이 되고, 따뜻한 마음은 불이 되고, 움직이는 마음은 바람이 되고, 텅 빈 마음은 공이 되고, 아는 마음은 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섯으로 나누어진 마음은 각각의 존재로서 활동하면서 서로 합하기도 하고 나누어지기도 하면서 천변만화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천변만화하는 청정 본심은 만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살에 있으면 자비심이 되고, 연각(緣覺)에 있으면 십이인연을 깨달은 마음이 되며, 성문(聲聞)에 있으면 사제법(四諦法)을 깨달은 마음이 되고, 중생에 있으면 견물생심(見物生心)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견물생심이란 중생은 물건을 보면, 가지려 하고, 모으려 하고, 바꾸려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마음도 비로자나불의 청정 본심과 같이 천변만화를 일으키는 공능이 있습니다. 중생의 마음이 한 생각 진실할 때가 부처의 마음이요, 한 생각 자비할 때가 보살의 마음이며, 한 생각 깨끗할 때가 성문의 마음이요, 한 생각 고요할 때가 연각의 마음이며, 한 생각 착할 때가 천상의 마음이요, 한 생각 바를 때가 인간의 마음이며, 한 생각 투쟁할 때가 수라의 마음이요, 한 생각 어리석을 때가 축생의 마음이며, 한 생각 탐욕 할 때가 아귀의 마음이요, 한 생각 성날 때가 지옥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의 마음을 옳게 사용하면 청정 본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중생은 이 공능을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지 않고 업(業)의 근원으로 만들어 육도를 윤회하는 방향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육도를 윤회하는 마음자리를 찾아봅니다.
 
법신불의 본심을 진여심(眞如心)으로 무형(無形)의 자성심이요, 중생의 업심(業心)을 유형(有形)의 자성심입니다. 무형의 자성심은 심인(心印)으로 영원하며, 유형의 자성심은 업의 번뇌로 윤회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법신이 윤회하는 중생을 위하여 천백억화신의 몸으로 나타나지만, 그 몸도 중생의 인연으로 생긴 몸이기에 곧 변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잠시 머무는 화신불은 사대[地水火風]로 몸을 이루어 공(空)에서 놀며, 중도(中道)의 법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심(佛心)은 곧 허공과 같아서 하나의 마음에 만법을 포용하며, 만법을 포용한 마음을 어느 하나에다 중심을 세울 수 없어 무심(無心)이라 하며, 어느 하나에 정을 줄 수 없어 무정(無情)이라 하고, 어느 하나를 잡아 보일 수가 없어 무애(無礙)라 하며, 어느 하나로 수명을 정할 수 없어 무상(無常)이라 하며, 어느 하나로 가질 수 없어 평등(平等)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하나만을 깨달으면 여래십호(如來十號) 가운데 어느 하나의 경지에 도달하여 수다원(須陀洹)이나 사다함(斯多含)이나 아나함(阿那含)이나 아라한(阿羅漢)이 되며, 전체를 깨달으면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중생은 수행에도 욕심을 일으킵니다. 정진도 고행도 제대로 하지 않고 큰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즉 해탈할 만큼 정진하지도 않고 해탈 이상의 열반이나 성불을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욕심내지 말고 하나하나 단계를 밟는 수행으로 먼저 자신의 본심부터 찾는 수행으로 시작합시다. 처음 들어가는 문은 무심(無心)으로 시작하든, 무정으로 시작하든, 무애(無礙)로 시작하든, 무상(無常)으로 시작하든, 평등으로 시작하든 각각의 쉬운 인연을 택하면 됩니다. 석가모니불의 고행(苦行), 아미타불의 원력, 문수보살은 지혜, 보현보살은 원만한 행(行), 관음보살은 자비(慈悲), 대세지(大勢至)보살은 희사(喜捨)를 보이신 것도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이제 우리는 진언 염송하면서 무심(無心)을 시작으로 비로자나불의 청정한 마음자리와 하나가 되도록 수행합시다.
 
비로자나불의 청정한 법신의 마음자리가 곧 원만보신의 마음자리요, 원만보신의 마음자리가 곧 천백억화신의 마음자리며, 화신의 마음자리가 곧 나의 마음자리입니다. 보이지 않는 청정 본심이 보이게 나타나면 밝은 빛이 되고, 들리는 소리로 나타나면 진언이 되는 것입니다. 진언은 각각의 빛과 능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청정(淸淨)의 빛이 중생의 눈에 보일 때는 백색(白色)을 바탕으로 빛의 삼원색(三原色)이 나타나 오색의 신비로움으로 보이며, 오색은 다시 36색으로 보이며, 나아가 무한의 색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빛의 삼원색이 모양으로 나타나면 산하대지(山下大地)요 우리 몸입니다. 그리고 청정 본심의 소리가 진언입니다. 진언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가장 밝으며 가장 으뜸가는 진언이 옴·마·니·반·메·훔입니다. 진언의 첫소리 ‘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로 청정 본심을 지녔으며, ‘마’는 동방 아축불로 보리심을 일으키는 작용을 하고, ‘니’는 남방 보생불로 공덕을 이루는 작용을 하고, ‘반’은 서방 아미타불로 지혜를 일으키는 작용을 하고, ‘메’는 북방 불공성취불로 정진의 용맹심을 일으키는 작용을 하고, ‘훔’은 간방(間方)의 금강보살로 금강을 지녀 일체의 행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자진언을 염송할 때 우리 몸에 염송의 기수(記數)를 펼치는 것은 곧 빛의 상호공양(相互供養)이며, 소리의 상호공양이며, 불과 중생이 하나 되는 본심의 상호공양이 되는 것입니다. 상호공양으로 마음의 불상을 조성하고, 마음의 불탑을 세우며, 마음의 승을 공양하여 비로자나불의 청정 본심의 자리로 귀향하는 것입니다.
 
진언 수행은 대 자유인이 되어 비로자나불의 청정 본심의 자리로 귀향(歸鄕)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비로자나불이 좋은 의미로 나누어준 여섯 마음을 어리석게도 잘못 활용하여 윤회의 업만 더욱 두텁게 하였던 것입니다. 땅의 단단한 마음은 나눔을 멀리하였고, 물의 습한 마음은 부드러움을 멀리하였고, 불의 따뜻한 마음은 자비를 멀리하였고, 바람의 움직이는 마음은 선행을 멀리하였고, 공의 빈 마음은 집착을 쌓았으며, 식의 아는 마음은 사견만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제 안과 밖이 청정한 본심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음을 참회하면서 제자리로 되돌려야 합니다. 되돌리는 방법은 ‘옴’을 부르면서 부처의 청정을 생각하고, ‘마’를 부르면서 부처의 견고한 보리심을 생각하고, ‘니’를 부르면서 부처의 공덕을 생각하고, ‘반’을 부르면서 부처의 지혜를 생각하고, ‘메’를 부르면서 부처의 용맹심을 생각하고, ‘훔’을 부르면서 부처의 상호공양을 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해탈과 열반을 멀리서만 찾았습니다. 나의 것이라는 생각,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만 내려놓으면 그 자리가 해탈의 자리요 열반의 자리며 성불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손을 펴서 움켜쥔 것을 놓듯이, 웃음으로 성냄을 바꾸듯이, 고요한 가운데 지혜의 참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읍시다. 근심과 걱정은 애욕과 집착으로 생겨나고, 재앙은 욕심으로 들어오며, 허물은 경망스러움으로 생기며, 죄는 참지 못하는 가운데 짓게 되는 것입니다. 내 몸이 곧 무형(無形)의 법신이며, 천백억화신이 곧 나 자신입니다. 눈으로는 그릇된 빛을 보지 말며, 입으로는 실없는 말을 하지 말고 진언을 말하며, 몸으로는 부처를 닮는 결인(結印)으로 지혜와 덕을 쌓도록 합시다. 작은 공으로 큰 공덕을 바라지 말며, 지나간 일에 연연하여 원망하지 말며, 권력(權力)에 의뢰하고 금력(金力)을 믿지 말며, 상대방을 볼 때는 좋은 것을 생각하며, 용서하고 베푸는 마음으로 행동하면서 집착하던 것을 놓읍시다. 나 자신마저도 놓아버립시다. 모두 놓아버리면 자연 절로 비워질 것입니다. 마음이 비워지면, 비워진 그 공간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채워져서 하나가 되는 대화합의 넉넉한 해탈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청정 본심의 자리로 귀향하는 최고의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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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 정사/기로스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