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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제568호)

편집부   
입력 : 2011-11-07  | 수정 : 2011-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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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총인예하 추대에 즈음하여-시대적 요구에 반응한 종단의 일대사

종단이 새 총인을 옹립하였다. 지난 10월 25일 종단 최고의결기관인 종의회와 원로기구인 인의회(印議會)는 만장일치로 지덕을 원만구족한 성초 원로스승님을 대한불교진각종 제11대 총인(總印)으로 추대하였음을 세상에 알렸다. 사바의 만중생과 함께 찬탄하고 경하할 일이다.

우리는 새 총인예하를 모시게 된 이 환희롭고 상서로운 날, 세간의 예사롭지 않은 여러 법문에 주목한다. 튀니지에서 촉발된 '재스민 혁명'이 이집트, 수단, 알제리, 요르단, 예멘을 거쳐 미국의 월스트리트가, 심지어 가까운 중국과 북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거센 불길은 세기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를 몰아낸 리비아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세간에서는 각국의 이러한 현상을 SNS를 통한 시민혁명으로 규정짓고 있거니와, 우리는 여기서 '재스민 혁명', 즉 SNS에 의한 시민혁명이 왜 발생하게 되었는가를 관찰해 보지 않을 수 없다.

SNS(Social Network Service)는 사회연결망서비스라는 말에서 보듯이 파편화 된 개인과 개인을 연결시켜 주는 인드라망이다. 인류는 급격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단절과 소외, 고립과 고독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자본이 이룩한 거대한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파편화와 물화(物化)는 속절없는 필연이었다. 이 도착(倒錯)된 인류의 삶에 일대 전환을 가져 온 것이 바로 SNS다. 시대적 요구에 제대로 반응한 결과물이다. 이제 인류는 오랜 단절과 고립에서 벗어나 소통과 교감을 지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수평적 소통이 가능해진 데 비해 수직적 소통과 교감은 아직도 요원하다는 점이다. 수평적 소통과 수직적 불통-'재스민 혁명'은 정확히 바로 이 지점에 놓여있다. SNS를 통해 수평적 소통의 지평을 확장한 대중은 수직적 불통에 분노하고 저항하기 시작했고, 이 분노와 저항은 세계 초강대국이라는 미국마저 뒤흔들고 있다. 바로 맨하튼 주코티공원에서 발화한 반(反) 월가(街)시위가 그것이다. 이제 대중은 언제 어디서나 소통을 외면하는 권력에 즉시성과 상호성으로 상징되는 SNS로 즉각적이며 통일된 형태로 저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소통을 향한 시대적 요청인 '재스민 혁명'은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한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정신과 정확히 맞물리면서 무한한 확장성을 보여주고 있다.

재스민 향기는 북한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재스민 향의 유입을 두려워 한 지도부가 이집트, 리비아의 북한 교민의 입국을 금지한 것이다. 불통과 먹통을  최종병기 로 삼고 있는 독재자로서 취한 이 당연한 조치는 그러나 불통과 먹통의 책임은 전적으로 리더에게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반증한다. 대중과 시대의 감성을 읽지 못하고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반응하지 못하는 독재자일수록 소통은 없고 호통만 있다. 소통과 교감을 외면한 리더는 대중의 외면과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소박한 진리는 북한이라고 피해가지 않을 것이다.

소통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감, 통찰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제 지구상 그 어디에도 공감이 결여된 리더, 소통을 외면한 리더는 발붙일 곳이 없다. 그 집단이 이성적, 지성적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이 문명사적 거대한 인과의 흐름에 따라 진각종 최고법통인 총인에 원융무애(圓融無碍), 광대원만(廣大圓滿)한 삶의 전형을 보여준 성초 원로스승님이 추대되었고, 다음날 대한민국 수도 서울시장에 시민과의 소통을 최우선으로 삼는 '시민후보'가 당선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재스민 향기가 지구촌을 뒤덮고 있는 가운데 들려온 이 소식은 혼란과 갈등이 착종(錯綜)된 우리사회에 새로운 질서와 로고스를 부여한 일대사다.

진각종 제11대 성초 총인예하는 위로 법계 법신 비로자나부처님과 아래로 사바예토 고해중생들이 이사무애(理事無碍) 소통의 인드라망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해 주시기를 서원한다. 대한불교진각종 총인예하가 아니라면 어느 뉘라서 가난하고 병들고 불화하는 중생들과 끊임없이 소통하셨던 진각성존 회당대종사께서 보여주신 불작불행(佛作佛行)의 삶을 지금에 다시 보여 줄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