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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편집부   
입력 : 2010-09-13  | 수정 : 2010-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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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추석이 다가오면 선산에 벌초하는 날을 잡고 그간 떨어져 살던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올해는 유달리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태풍까지 연이어 닥치는 바람에 우거진 숲이 뒤엉켜 산소 가는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찔레덤불과 칡넝쿨이 엉켜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산등선을 어림잡아 산소를 찾아간다. 벌초도 하기 전에 후줄근하게 땀이 흐르고 늦여름인지 초가을인지도 모를 날씨에 렌즈에 땀이 흘러내려 안경을 벗었다 쓰기를 반복한다. 앞산 뒷산 할 것 없이 굉음을 지르는 예취기 소리에 고요하던 산들이 들썩거린다. 가끔 산비둘기 울음소리만 고즈넉하게 들려올 뿐이다.

베어진 풀을 끌어 모아 정리를 하고 깔끔하게 단장된 산소를 둘러보니 사방에서 향긋한 풀 냄새가 밀려든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땀이 흘러내려 닦고 쓰기를 반복하던 안경을 아예 벗어 곁에 두었다. 얼룩진 안경으로는 선명하지 않던 구름이 푸르디푸른 하늘에 가을을 수놓고 있었다.

솔바람 한줌 스쳐지나가고 이름 모를 새소리에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휘둘러보니 산등선을 넘나드는 바람이 보이고 저 멀리 굴참나무 도토리가 햇살에 빛나는 것도 보인다. 다람쥐 발자국 소리와 고추잠자리 날갯짓 소리도 들릴 것만 같다.

졸졸거리는 골짜기 물소리가 들리더니 팔랑거리는 나뭇잎이 보인다. 벌초를 하면서 무엇을 보려고 안경을 썼던지 웃음이 픽 돌았다. 안경을 벗으면 저 멀리 구름과 하늘, 나무들이 보이는데 한치 앞을 보기 위해 나는 안경을 쓰고 있었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어선지 벌초 마친 뒤 벗었던 안경은 두고 별 생각 없이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니 안경 없는 세상은 오리무중이구나. 구름과 나무는 보이지 않고 콘크리트 건물과 쏟아지는 활자들, 한치 앞이라도 봐야만 먹고사는 현실에 청맹과니 심정이 되어 견디다 못해 새 안경을 맞추었다.

난시에 원시까지 겹쳐서 산과 나무는커녕 발치 아래만 보며 살아야하는 세상 속으로 다시 빠져들고 말았다.


임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