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칠존이야기- 21.금강어보살

밀교신문   
입력 : 2018-12-31  | 수정 : 2019-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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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전하는 지혜로운 비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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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기능은 전하는 데에 있다.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뜻을 소통하기 위하여 소리나 문자 등의 수단을 사용하여 전달하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여 사회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문화에 대한 참여자로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언어를 통하여 사람은 사회집단을 이루어 생존하고, 자기가 속하는 사회·문화 속에 참여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또는 둘러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 가운데 언어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언어는 전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언어를 학습하고 이것을 타인에게 전달하며, 언어를 통해 경험을 전하는 능력은 문화로 알려진 모든 행동양식 발전의 기초이며 인간다운 삶의 근본이다.

그래서 언어는 소통과 진보의 도구이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을 때에는 도리어 장벽이 되기도 한다. 지구상의 많은 국가가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국가 간에 또는 부족 간의 교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국가에서도 교류가 뜸한 지방의 언어는 다른 지방어와 만날 때 소통이 쉽지 않다.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지역의 습관이나 음식을 고집하는 것처럼 언어의 습관을 쉽게 놓지 않으며, 다른 지역의 언어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이것은 과거에 지역과 지역,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서로 평화롭게 지내기보다는 영토와 식량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가 대부분인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영역확장과 재물을 추구하기 위하여 오히려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 현재 세계의 젊은이들이 타국의 언어를 익히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소통의 영역을 보다 넓히기 위한 노력이다. 과거에도 불교를 세계에 전하기 위해서 인도의 승려들이 수많은 지방어가 있는 인도에서, 그리고 서역과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지로 퍼져나갈 때에 이들이 법을 전하기 위한 방법도 언어였고 장벽이 된 것도 언어였다.

불교경전에서는 이러한 언어의 문제에 관한 언급이 있다.
'화엄경'에서 “한 음성 가운데서 한량없는 음성을 내어 중생들의 차별한 마음을 따라 골고루 이르러서 그로 하여금 해탈케”한다고 한다. 중생의 근기에 맞는 다양한 설법이기도 하지만 언어가 막힐 때 접하게 되는 장벽이라는 점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밀교에 이르러 '제불경계섭진실경'에는 모든 언어에 통달한 금강어보살이 등장한다.
“나는 금강의 언어이다. 나는 지금 모든 중생에게 완전한 성취법을 수여한다. 내 몸의 색과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 온갖 중생, 시방세계의 산천과 강, 연못, 초목, 수풀은 다 홍련색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금강권을 하고 입의 좌우에 두고 오고 가는 모습을 만드는 것이 마치 금강어언보살과 같다. 이 인을 결하면 온갖 중생의 언어에 통달한다.”

한 음성으로 무수한 언어를 설한다고 하는 구절은 여러 경전에서 설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보살을 금강계만다라의 금강어보살에서 볼 수 있다. 혹은 과거에 언어소통으로 인해 곤란을 겪었던 전법승이 갖고자 했던 수승한 능력이 금강어보살로 승화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금강어보살에게서는 언어가 달라서 법을 전하지 못하는 일은 없다.

'유가유기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에서 ‘금강언보살’, ‘금강어언보살’, ‘무언대보살’이라 하며, 모든 중생의 언어에 통달하여 모든 중생들의 언어대로 알아들을 수 있게 제법의 실상을 중생을 위하여 설법한다. 백팔명찬에는 ‘금강어언ㆍ금강염송ㆍ무언의 깨달음을 수여함ㆍ금강의 최고 성취ㆍ금강언설’로 그 덕이 찬탄된다. 이러한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금강어보살의 특징은 설법에 있다. 학문의 완성을 언어의 표현에서 보듯이 불교의 가르침은 언어가 되어 중생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이것은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하는 지혜문 사보살의 궁극적 활동목적이기도 하다. 중생들로 하여금 지혜를 증장시키고 번뇌를 없애고자 사보살 가운데 금강법보살은 중생의 청정함을 지켜주는 뛰어난 지혜의 활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번뇌를 아직 끊지 못한 중생들에게 금강리보살은 법열의 마음을 가지고 반야의 바른 지혜를 일어나게 하고 일체의 번뇌를 끊게 한다. 또한 곧 발심하자마자 곧 법륜을 굴리는 보살이 지혜를 인으로 하는 금강인보살이다. 이러한 모든 활동은 비밀어를 지닌 금강어보살에 의해서 일단락되는 것이다.

그러나 금강어는 '금강정경'에 ‘일체여래의 비밀어’와 ‘무언대보살’로 표현되듯이 말없이 전하는 지혜로운 비밀어이다. '금강정경'에서 그 출생을 밝힌 문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때에 세존은 다시 무언대보살삼매에서 출생한 법가지의 금강삼마지에 들어간다. 곧 일체여래심이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나오자마자 곧 저 덕을 갖춘 금강수보살은 일체여래 진리의 문자를 이루고 출현하고 나서 이로부터 금강염송의 모습을 출현하고 일체여래의 법광명을 내뿜으며, 일체부처의 신통과 유희로써 금강살타삼마지에서 아주 견고한 까닭에 합하여 한 몸이 되어 무언대보살신을 출생한다.”

이와 같이 금강어보살은 무언대보살삼매에서 출생하였으며, 무언으로써 법광명을 내뿜으며 고요히 퍼지는 가르침이 금강어보살의 설법이다. 진리의 문자로부터 출현한 금강염송도 입을 다물고 묵묵히 하는 염송을 가리킨다. 이것은 앞에서 ‘저 견고한 본래의 무신으로 말미암아 금강살타신을 출현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무언의 설법에서 금강과 같이 견고한 설법이 보여지는 것이다. '화엄경'에서 “여래의 음성은 방소에 머무르지 아니하여 말이 없다.”고 한다. 정해지지 않은 모습이기에 모든 언어에 맞는 무한한 모습을 구현하는 것이 여래의 음성이다.

다시 '삼십칠존심요'에는 다음과 같이 무언의 의미를 설한다.
“진여법계는 평등한 경전이다.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법문이 원만하고, 대승불교의 공성를 깨달아 열어 펼치지 않음이 없다. 이에 뛰어난 법을 모든 부처님과 함께 담론하며, 율을 외우고, 훌륭하게 일대의 진언을 여기에서 준비한다. 이것이 말없는 무언보살의 언어삼마지지이다.”

만일 법을 설하되 그 법에 고정불변의 성격이 있어서는 참된 가르침이라 할 수 없다. 대승의 공을 설한다면, 그 가르침마저도 종국에는 강을 건넌 뗏목처럼 버려야 하는 것이 언어이다. 왜냐하면 언어의 특성은 무엇인가 완결된 것, 고정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대승의 공은 그 어떤 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것이므로 고정성을 지니는 언어로써는 그 의미를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 마치 '유마경'에서 문수보살이 불이(不二)법문에 대한 견해를 유마거사에게 물었을 때에 그 유명한 침묵으로 설법을 대신한 것과 같다. 침묵이란 상대적인 언어로 설명하는 분별의 차별심을 텅 비운 본래심의 입장이며, 진실과 하나가 된 불이의 경지를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은 무언의 설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금강정경'에는 ‘금강결인과 상응하므로 최상의 금강어를 성취한다’고 하며, 또 '약출염송경'에는 ‘금강어언의 인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염송의 성취를 얻는다’고 그 결인의 공능을 설한다. '성위경'에는 그 언어를 떠난 무언의 삼마지지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금강밀어의 언설을 떠난 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이러한 삼마지지로부터 금강의 혀[舌] 위의 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고, 시방 일체중생의 못된 꾀를 없애며, 네 가지 걸림없는 말솜씨를 얻게 한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 하기 위하여 금강어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관자재왕여래의 뒤쪽 월륜에 머문다.”

여기에서 금강의 혀는 온갖 중생의 언어에 통달하면서도, 우리들의 상대적인 언설이 아닌 절대의 금강어로 사람들의 마음에 품은 온갖 못된 꾀와 악행을 제거하고, 사람들에게 진리를 이해하게 하는 언어를 떠난 언어를 상징한다. 이와 같이 말없이 사람을 납득시키는 수승한 지혜와 뛰어난 변론의 묘용을 상징하기 위하여 금강어보살은 오른손으로 여래의 혀[舌]을 들고 가슴에 대고 있으며, 좌권은 무릎 위에 놓고 있다. 이것은 지혜의 비밀어를 가지고 중생들에게 설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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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어보살
 
김영덕 교수/ 위덕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