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가만히 들여다 보는 경전-시작하다

밀교신문   
입력 : 2018-12-31  | 수정 : 201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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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은 발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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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남자가 먼 곳으로 장사를 하러갔다가 큰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돌아오던 중에 그만 바다에 그 많은 돈을 몽땅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남자는 낭패를 보고 말았지요. 하지만 이 남자는 뭍에 이르자마자 커다란 물통을 구해서 다시 바닷가로 나아갔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지요.
“아니, 뭘 하려는 게요?”
“당신 전 재산을 잃어버린 바다로 무엇 하러 다시 나가는 게요? 나 같으면 두 번 다시 바다로 나아가지는 않을 텐데.”
남자는 외쳤습니다.
“내가 그토록 고생해서 번 돈을 이대로 날릴 수는 없다. 바닷물을 다 퍼내서라도 그 재물을 반드시 찾고야 말 테다.”
남자는 날마다 바다로 나가서 바닷물을 퍼냈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조금도 쉬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전 재산을 다 잃더니 그만 미쳐버린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남자는 사람들의 조롱과 수군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날마다 바다로 나가서 물을 퍼내 산으로 날라다 부었습니다. 이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던 바다의 신이 결국 나섰습니다. 여느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한 바다의 신이 이 남자를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대체 뭘 하는 것이오?”
 
남자는 자신의 사정을 말했습니다. 바다의 신은 딱하다는 듯 대답했습니다.
“설령 그대가 지금 이 바닷물을 다 퍼낸다고 해도 이 바다에는 육지에서 수천수만 갈래 물줄기가 흘러들고 있소. 그대가 퍼내는 그 이상으로 물이 흘러드는데 그래도 이걸 다 퍼내겠다는 것이오?”
 
남자의 대답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렇소. 난 하겠소. 해내겠다는 마음 하나면 되지 않겠소. 언젠가는 바닷물이 다 마를 날이 있을 것이라 믿소.”
바닷물을 다 퍼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고 덤벼드는 데야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결국 바다의 신은 이 남자의 결심과 정성에 감동해서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재물을 꺼내주었습니다.(<불본행집경>)
새해가 밝았습니다. 한해의 출발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결심을 합니다. 결심(決心)이라는 말-무엇인가를 하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는 것이지요. 작심(作心)이라는 한자어도 같은 뜻입니다. 굳게 먹은 마음이 사나흘도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 없던 일이 되어버리는 작심삼일이란 말도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결심이나 작심보다 발심(發心)이란 말을 더 많이 씁니다. 그런데 이 발심에는 앞의 두 글자와는 다른 뜻이 담겨 있지요. 발심이란 말 그대로 ‘마음을 낸다’는 뜻입니다. 결심이나 작심보다 그 단단함이 덜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발심은 여느 사람들이 마음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발심이란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의 깨달음은 부처님의 경지인 가장 완전한 깨달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발심은 결국 부처님 지혜(아뇩다라삼약삼보리)를 얻겠다고 마음을 내는 것이요, 한 마디로 말해서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을 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리해보면 더 흥미롭습니다.
 
발심
발보리심
발아뇩다라삼약삼보리심
 
사람들은 발심한다는 말을 불교 세계에 처음 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생로병사의 파도 속에서 울고 웃다가 마음의 의지처를 찾아 절에 가서 생전 처음 기도하는 것을 발심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경전을 읽어보면 발심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그동안의 신앙생활과 수행생활에 아주 커다란 전환점을 맞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기도와 수행이 자기와 자기 주변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 조금 더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살피고 마음을 크게 열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더라도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수행을 하더라도 나를 위함은 물론이거니와 이웃을 위해 수행을 하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보살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발심이란 세상의 행복을 위해 내 자신을 기꺼이 바치겠노라고 마음을 굳게 먹는 보살의 행동이요, 그 목적은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차이점이 느껴지시나요?
 
새해에 빨갛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빕니다. 그런데 불자라면, 보살이라면 이웃과 세상이 건강해지고 행복해지고 지혜로워지기를 빕니다(발원). 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건강하고 행복하고 지혜로워지도록 적극적으로 두 팔을 걷고 나섭니다(보살행). 그래서 발심은 발원으로 이어지고, 발원은 보살행으로 나아갑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이렇게 묻기도 합니다.
“지금 당장 내가 힘들고 괴로워서 불보살님께 도움을 요청하는데, 이런 내가 어떻게 남들 걱정까지 해야 하나요? 난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습니다.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하지 않겠어요?”
이런 생각도 맞습니다. 어쩌면 보살행이니 뭐니 하는 것보다 더 현실적이란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세상이 혼탁하고 살기 힘든데 나와 내 가족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보살은 바로 이 지점을 응시합니다. 결국 나와 내 가족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세상이 행복해져야 한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는 것이지요. 이웃과 세상의 행복을 내 행복으로 삼으면서 나의 이로움과 다른 이들의 이로움을 함께 챙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의 행복을 다 챙겨주자면 내가 부처되는 공부며 수행은 언제 하겠냐고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앞서 바닷물을 퍼내던 남자 이야기가 암시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겠다고 작정하고 달려드는 사람 앞에는 누구라도 두 손을 들고 도와주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웃의 행복을 위해 내가 들인 정성과 노력이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여 그것이 나를 부처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즉, 저들이 행복해지도록 도움을 준 내 보살행이 부처가 되는 데 필요한 공덕이 된다는 것이 경전에서 거듭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힘든 삶이 편안해지고 행복해지려면 불보살님에게 기도하는 것은 임시처방일 뿐입니다. 부처가 되려면 이웃과 세상을 위해 저들이 행복해지기를 발원할 뿐만 아니라 저들이 행복해지도록 두 팔을 걷고 뛰어들어야 합니다.
 
이런 이치를 전해 듣고 “그래, 나도 한 번 그렇게 살아보겠어!”라고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발심입니다.
<대방등대집경>에는 이와 같은 발심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보배라는 이름의 어린 여성(寶女)이 사리불 존자에게 발심을 해야 하는 서른두 가지 이유를 들려줍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생명체를 구제하려고 발심합니다. 부처님 종자가 끊어지지 않고 부처님 법을 잘 간직해서 없어지지 않게 하려고 발심합니다. 모든 생명체들에게 고귀한 진리의 즐거움을 나누려고 발심하며, 모든 생명체를 위해 커다란 슬픔(大悲心)을 일으켜 번뇌에서 생기는 저들의 온갖 괴로움을 멀리 떠나게 하려고 발심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위해 스스로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바라밀을 얻겠다고 발심합니다. 이 여섯 가지 바라밀을 닦는 이유는 중생들도 자신처럼 바라밀을 닦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아가 보살은 모든 중생들의 교만을 깨뜨리게 하려고 발심하며, 온갖 생명체들의 성향을 두루 알기 위해 발심하며, 설령 자신을 두렵게 하는 존재라도 그를 보호하려고 발심하며, 부처님 지혜를 가까이 해서 얻는 미묘한 즐거움이라도 중생이 원한다면 기꺼이 저버릴 수 있으려고 발심합니다.
 
여전히 내 마음은 남을 위해 사는 보살도 앞에 망설여집니다. 하지만 경전을 읽어가자니 일단은 한번 그렇게 마음을 내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나는 보살로 태어났다는 생각, 그래서 올해는 보살로 살아가야겠다는 생각, 자꾸만 “나는 불보살님의 가피가 절실한 중생”이라는 생각이 사무치지만 보살인 척 하는 마음이라도 내어보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올 한 해 보살은 이렇게 발심으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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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령/불교방송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