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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집에 가다

밀교신문   
입력 : 2018-11-22  | 수정 : 2018-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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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집이 없어 행복했던 부처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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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는 시각, 나는 막 기차역에 도착했습니다. 저녁 강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대합실을 나오니 맵싸한 공기가 달려듭니다. 나와 같은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찬바람에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종종걸음으로 광장을 빠져나가더니 순식간에 흔적조차 없이 사라집니다. 다들 집으로 갔겠지요. 집에 가면 사랑하는 가족과, 주린 배를 따뜻하게 채울 밥상이 기다리고 있고, 온종일 직립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사지를 쭉 누일 수 있는 잠자리가 그들을 맞을 것입니다.

 

모두들 집으로 향하는 그 시각, 나만 혼자 저녁강의를 하려고 집을 떠나 더 먼 곳을 찾아왔습니다. 텅 빈 광장에서 외로움이 몰려옵니다. 나만 홀로 길에 서 있고, 길을 걷고 있으려니 피곤해집니다. 나도 저들처럼 그냥 집에 가고 싶어집니다,

 

에 간다는 말은 무한정의 직선거리로 쭉 나아간다는 뜻이 아니라, 어딘가를 향해 하염없이 내달렸다가도 결국 자기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말이지요.

 

집에 왔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자동인형처럼 채비를 차리고 집을 나와 종일 일을 한 사람들에게 바로 이 집에 왔다는 말은 하루라는 인생을 온전히 마쳤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내일을 위해 쉬겠다는 뜻입니다.

대체 집이란 한 사람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건축칼럼리스트 서윤영씨는 이란 말에 네 가지 뜻이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가옥을 뜻하고, 둘째는 가정, 셋째는 가풍, 넷째는 주거문화를 뜻한다는 것입니다(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p.20). 그러니 우리가 말하는 에는 물리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정서적, 문화적인 모든 것이 다 담겨 있는 만큼, 한 사람의 삶에서 을 떼어내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 말할 수 있습니다.

 

집에는 피로 이어진 사람들이 있고, 밥이 있고, 잠자리가 있고, 배우자와의 친밀한 신체적인 접촉이 있습니다. 집이 있어 우리는 살아가기 시작했고, 집을 떠난다는 것은 더 이상 살지 않는다는, 그러니까 죽는다는 말이 됩니다. 그 집이 내 소유가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들어가 쉬고 누울 공간인 집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따라서 집이 없는 사람, 집을 갖지 못한 사람, 집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기만 한 집을 자발적으로 거부하는 일도 있습니다. 출가가 그렇습니다. ‘집을 나오다라는 이 말은, 한 인간의 전부라 해도 좋을 세상을 스스로의 뜻으로 거부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출가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는, 쁘라브라자까(pravrājaka), 빠리브라자까(parivrājaka)입니다. 이 말들은 집을 나간다는 뜻이 아닌, 단순히 나아가다’, ‘돌아다니다란 뜻이건만 중국의 역경승들은 집을 나가다라는 뜻의 출가(出家)라고 옮겼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을 불교에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여겼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수행을 하려고 나아가는 사람, 산과 숲과 인간들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의 행위를 굳이 출가라고 불렀겠지요.

 

초기경전인 숫타니파타에는 집에 사는 재가(在家)의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재가자는 아내를 부양하나, 덕을 행하는 자에게는 내 것이랄 게 없다. 이 둘은 처소와 생활양식이 같지 않다. 재가자는 남의 생명 해치는 일을 삼가기 어렵지만, 성자는 그런 일을 언제나 삼가며 남의 목숨을 보호한다.”(전재성 옮김 숫타니파타p.505)

 

이 경문을 보자면, 집에 사는 재가자는 가족을 부양해야만 하느라 남의 생명을 해치는 일을 멈출 수가 없는, 숙명적으로 악업을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이 됩니다. 집에 대해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부처님인지라, 소치는 다니야(Dhaniya)와 나누는 이야기를 보자면, 집에 대한 입장 차이를 확연하게 느끼게 됩니다.

다니야가 먼저 노래합니다.

 

밥도 다 지어놓았고, 우유도 다 짜놓았고, 마히 강변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으며, 움막은 지붕이 덮여 있고 불도 켜져 있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이에 대해 부처님이 노래합니다.

 

분노하지 않아 마음의 황무지가 사라졌고, 마히 강변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내 움막은 열리고 나의 불은 꺼져 버렸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다시 다니야는 말합니다.

 

내 아내는 온순하고 탐욕스럽지 않아 오랜 세월 함께 살아도 내 마음에 흡족하며, 그녀에게 어떤 악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이에 대해 부처님은 또 노래합니다.

 

내 마음은 내게 온순하고 해탈하였고, 오랜 세월 잘 닦여지고 아주 잘 다스려져, 내게는 그 어떤 악도 찾아볼 수 없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다니야가 다시 노래합니다.

 

나 자신의 노동의 대가로 살아가고 건강한 나의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에게 그 어떤 악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다시 이에 대해 부처님은 노래합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대가를 바라지 않아, 내가 얻은 것으로 온 누리를 유행하므로 대가를 바랄 이유가 없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부처님과 목동 다니야의 노래를 듣던 악마가 이렇게 한 수 거듭니다.

 

자식이 있는 사람은 자식으로 기뻐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로 인해 기뻐합니다. 집착의 대상으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기쁨이 있으니, 집착이 없는 사람에게는 기쁨도 없습니다.”

 

부처님은 악마를 향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자식이 있는 이는 자식으로 슬퍼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슬퍼합니다. 집착의 대상으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슬픔이 있으니, 집착이 없는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습니다.”

 

결국 집에 사는 삶이란 얽매이고 묶인 삶이요, 그러니 흑단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영웅으로서, 재가생활의 특징을 없애 버리고, 재가생활의 속박을 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고 권합니다(같은 책, p.417).

 

숫타니파타의 해당 경문을 읽자면 마치 래퍼들의 배틀 같은 느낌도 듭니다. 아무튼 집에 머물고 만족하는 것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권하는 것이 부처님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부처님은 왕궁을 나온 뒤로 집이 없이 살아갔습니다. 부처님은 돌아갈 집이 없는데도, 언제 어디에 계시거나 그곳이 당신의 집인 양 편안하게 머물렀습니다. 그런 걸 보면 부처님은 이 세상 어디든 당신이 현재 계시는 곳이 집이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 목동 다니야처럼 숱한 사람들이 집을 예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사람들은 집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고 마음으로 방황을 합니다. 집은 우리를 편히 쉬게 하지 못하고 자꾸 무엇인가를 더 채우고 움켜쥐라고 내몹니다. 우리는 더 가지려고 애를 쓰고, 가진 것을 지키려고 고군분투하고, 그러다 잃어버리면 깊이 절망하고 울부짖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속의 집에는 근심, 슬픔, 우울, 불안, 괴로움이 도사리고 있다고 말씀하셨나 봅니다. 그 집을 나서는, 용감한 사람에게만이 진정으로 위안과 평온이 깃든다고 숱하게 이르셨지요.

 

어둑한 낯선 소도시 기차역.

 

저마다 집을 향해 바삐 흩어지고, 나만이 텅 빈 광장을 가로지르자니 집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저 사람들처럼,

 

하지만 부처님을 떠올렸습니다.

 

부처님이라면, 부처님이라면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시각, 법문을 베풀려고 나선 낯선 거리를 집이라 여기셨을 것입니다. 평생 돌아갈 집을 구하지 않은 부처님을 떠올리자니, 마음이 푸근하고 편안해집니다. 스산한 바람이 부는 낯선 거리에서 나는 조용히 이렇게 소리내어 봅니다.

 

“I'm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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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령/불교방송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