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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오컬트 영화 ‘제8일의 밤’

밀교신문   
입력 : 2021-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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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국경지대 사막의 현지인 무덤에서 석판과 사리함이 발견된다. 사리함에는 요괴의 붉은 눈과 검은 눈이 가두어져 있다. 이 둘이 만나면 세상의 지옥토가 된다. 그래서 부처는 그 둘을 서쪽의 사막과 동쪽의 절벽 속에 가두었다. 이들이 다시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제자들의 업(카르마)라고 당부한다.
 
교수는 세상에 이 유물을 공개하지만 탄소연대 측정 결과 가짜임이 드러난다. 희대의 사기범으로 몰린 교수는 자살하려다 말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사리함을 석불 밑에 감추어 두었다. 붉은 달이 뜨는 밤 붉은 눈과 검은 눈이 만날 운명을 막기 위해 승려(選花)를 키우지만 처자식이 죽고 나서 절을 떠난다. 대신 그의 가족을 죽인 자의 아들(청석)을 받아들여 묵언으로 수행하게 한다. 또 애란을 양녀로 키우는데 자살하고 귀신이 된다. 그녀는 붉은 눈이 밟고 갈 일곱 번째 징검다리 처녀 보살이다. 예정대로 붉은 달이 뜨는 날이 다가오자 노승은 청석에게 선화를 찾아가서 사리함을 전하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좌선에 들어 눈을 감는다.
 
영화의 시작부터 애니메이션과 함께 범어로 구술되는 이 설화가 나는 금강경 어딘가에 정말로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감독이 지어낸 것이라고 한다. 지금 이 영화가 넷플릭스에서 한참 인기몰이를 하고 있지만 금강경 이야기란 애당초 있지도 않은 허구란 말이다. 사막에서 발견된 사리함이 뉴스보도대로 가짜라면 교수는 사기꾼이며 출가해서 벌인 일도 종교망상으로 벌인 것이 된다. 혹자는 이를 어이없는 허구로 받아들일지 모르겠으나 영화의 가장 큰 전제는 사실과 허구가 다르지 않다는 것(不二)이다. 부처님이 왜 요괴의 붉은 눈과 검은 눈을 없애지 않았느냐는 청석의 물음에 노승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으므로 없앨 순 없다.”고 답한다. 무엇보다 영화의 마지막에 감독은 노승의 목소리로 관객에게 선화의 깨달음을 들려준다.
 
“어둠이 깊으면 빛은 더욱 찬란하고 번뇌가 크면 해탈도 큰 법. 생은 무엇이냐? 생은 잠시 피어난 풀싹 같은 것. 꿈이며 환상이며 물거품이며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은 것. 참으로 허무한 것. 허나 정해진 운명 속에 허무한 잠시일지라도 모든 것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법. 선화야. 이제 그 의미를 찾았으면 슬픈 꿈에서 깰 시간이다.”
그래서 좀비로 변한 형사가 부서진 불상을 불 속에 던져 넣는 신(scene)도 신성모독으로 보이지 않는다. 법신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없는 곳이 없다. 내 마음이 부처라는 것도 그래서이다. 이런 깨달음이 있다면 목불을 도끼로 쪼개어 불쏘시개로 쓴 단하천연(丹霞天然)의 공안(丹霞燒佛)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법당과 신당, 승려와 무속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스님은 퇴마사로 격하되고 금강경을 무속설화로 모독하는가 하면 부적으로 과학수사를 비웃는다. 그래서 필자는 영하의 중반부까지 헛웃음만 짓고 있었지만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고 소재로 활용한 영화라는 데 주목하게 되었다. 불교를 소재로 한 오컬트 영화 여기저기를 가득 채운 ‘옴’자나 육자진언도 내심 반가웠다. 선화는 요괴를 물리치기 위해 주로 ‘옴’자를 도끼날이나 사람의 얼굴에 그려댄다. 아닌 게 아니라 좀비나 어둠의 그림자로 변한 요괴는 부적처럼 그려진 ‘옴’자 앞에서 위신력을 잃는다. 그것은 마치 십자가나 마늘, 성물을 보면 기력을 잃고마는 드라큘라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왜 옴에 그런 위신력을 지니는지 주목하는 관객이 없고 알아들을 수 없는 범어가 부적처럼 그려지고 주문처럼 읊어질 뿐이다.
 
영화에서 8개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며 희생되는 사람들은 좀비의 형상이다. ‘부산행’이나 ‘킹덤’ 같은 한국 좀비물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전통적으로 한국의 요괴는 장화홍련전처럼 인간적인 해원상생(解寃相生)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와 달리 일본 호러영화에서 요괴는 밑도 끝도 없이 해칠 사람을 찾아다닌다. 이들을 물리치는 것은 이 영화에서처럼 주로 승려나 퇴마사이다. 이처럼 드라큘라 코드, 좀비영화, 일본 공포영화 코드를 뒤섞은 이 영화를 혹자는 가장 한국적인 오컬트 영화라고 호평하기도 했지만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
 
제8일의 밤, 선화는 가족을 죽인 가해자의 아들인 청석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희생함으로써 번뇌에서 놓여난다. 영화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번민’한다 하고 지난 일에 대해서 ‘번뇌’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떠난 사람에 대한 ‘번뇌’를 벗지 못해 망자의 내생이 어찌 될까 ‘번민’하다가 천도재를 지내게 되는 것인가? 그러나 지난 일도 앞으로 올 일도 생각하기 나름이다. 죽은 자는 현생에서 지은 업을 그대로 받고 윤회할 것이다. 선화는 귀신을 천도해야 하는 숙명으로 살다가 결국 자신을 희생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번뇌와 번민이 만나면 지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산 사람이 거기서 놓여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진각종에선 천도재를 지내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신에서 청석은 사리함이 발견된 사막의 묘지를 찾아간다. 사리함은 원래 발견된 자리에 묻히고 애란의 손을 잡고 떠난다. 그리고 ‘제8일의 밤’이라는 자막에서 8자는 수평으로 뉘어져 ∞(무한대)로 바뀐다.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번민과 번뇌는 영원할 것이라는 화두가 그려지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김명석 교수/위덕대 한국어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