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밀교전개사 23

허일범 교수   
입력 : 2002-02-18  | 수정 : 200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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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밀교의 특징 조선사회의 불교에 대한 부정적 분위기 속에서도 밀교적 요소를 띤 신앙들은 왕실과 민중들 사이에서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었다. 교리적 측면에서 그렇다할 전개를 보이지 못한 반면 신앙적 측면에서는 척불정책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 중에서 진언다라니신앙, 밀교제천에 대한 신앙, 민중들의 구복적 요청을 반영한 의식집의 간행과 각종 의식의 집행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심오한 교리의 이해나 전문적 의식의 집행을 요구하지 않는 평범한 밀교신앙의 형태들이다. 여기서 밀교에 대해서 신앙이라는 표현을 쓰는 데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밀교의 경우, 경궤의 내용에 입각한 충실한 신행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몇 가지 단편적인 밀교적 요소들만을 취하여 신앙적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즉 조선밀교는 경전이나 의궤 중심의 전문적 수행이나 의식이 아닌 구복적 성격이 강한 형태의 신앙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역성혁명이후 유교의 기틀아래 사회의 체제구축과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려했던 당시 집권세력의 경직성에 대한 반동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의 윤리는 인간의 도리를 구축하는 데에는 탁월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도덕율에 의한 사회통치는 매우 이상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불문율이든 성문율이든 율법적인 통치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거기서 유교적으로 접근 할 수 없는 인본적이며,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신앙적 욕구충족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저 기원을 통한 행복의 추구와 그에 따른 의식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신앙적 욕구를 달성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 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현세이익적 밀교신앙과 의식의 집행이었다. 따라서 우리들은 조선시대의 불교를 숭유억불정책에 의해서 피폐해진 측면만을 부정적인 시각에서 부각시킬 것이 아니라 그런 시대상황 속에서도 불교의 존속을 위해 발버둥친 생생한 역사의 흔적들을 등한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2. 조선 밀교의 형태 1) 진언다라니신앙 진언다라니신앙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왕실에서는 세종 때까지 국왕의 어좌에 진언다라니가 새겨져 있었으며, 세조는 피부병의 치료를 위하여 진언종자가 새겨진 속옷을 입었고, 경국대전의 도승조에 의하면 살차타주를 독파하는 자에게 도승이 허락된 일이 있다. 한편 사찰에서는 진언다라니를 불보살의 복장에 봉안하거나 건축물의 단청에 문양의 일부분으로 도화하기도 하고, 동종이나 각종 법구류에 인각하거나 불화의 가장자리에 서사하여 결계의 의미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현상들에 대해서 단적으로 밀교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밀교경궤에 설해져 있는 내용이라면 밀교의 진언다라니신앙으로 규정하는 데에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된다. 2) 제천공양신앙 제천신앙은 사찰의 신중탱화와 무속의 의식을 통하여 전승되었다. 흔히 불보살이나 제천에 대한 예경을 통하여 공덕을 성취하고, 그들의 가피력으로 제존의 위신력을 체현하려는 것은 일반적인 공양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대부분의 사찰들에 봉안된 불보살상을 보면 그 종류가 한정되어 있고, 특히 밀교적인 존상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즉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미륵불, 약사여래, 관음보살, 문수보살, 지장보살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중탱화에 그려진 제천은 밀교적인 존격으로써 인도에서부터 민중들에게 신앙되어 오던 존격들이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 한정된 종류의 불보살상이 봉안되고, 신중탱화에서 밀교적 존격들이 등장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다. 먼저 불보살상의 경우, 당시 밀교의 경궤와 관련을 가진 다양한 존상의 조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삼국시대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밀교의 행법이 온전하게 전승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밀교의 행법에서는 항상 유형의 본존이 등장하며, 의식의 종류가 있는 만큼 다양한 존상들을 활용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밀교의 전승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조선시대의 현실에서 다양한 밀교의 존상들은 조성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제천신앙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신중탱화의 경우는 다양한 밀교의 신중들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고귀한 불보살에 대한 신앙보다는 소박하면서도 친근감을 더해주는 신중을 통하여 소원을 성취하려 했던 민중신앙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민간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던 무속에 밀교적 요소들이 유입되기도 하고, 사찰의 본당에 본존과 더불어 신중탱화가 봉안되었던 것이다. 3) 소원성취의식 의식집의 편찬과 의식의 집행은 민중들의 신앙형태가 아니라 전문적 승려들의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조선초기에는 고려시대의 밀교를 답습하여 소재도량, 사천왕도량, 문두루도량, 공작명왕도량 등이 개설되었고, 중기이후에는 대부분 식재도량의 성격이 강한 법회들이 왕실과 국가권력층의 요청에 따라서 개설되었다. 이와 같은 의식들이 집행되면서 거기에 따른 제불보살복장단의식, 진언권공, 자기문 같은 의식집들이 간행되었다. 거기서 조선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의식집들이 편찬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진언집의 편찬은 밀교의 전통이 전승되고 있지 않았던 시대상황 속에서 밀교의식의 한 단면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선시대 간행된 의식집들은 전적으로 밀교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부분적으로 밀교의 경궤에 등장하는 진언과 관법 등을 열거하고 있는데 불과하다. 이것 또한 복잡한 의식이나 행법을 요구하지 않았던 당시 사람들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불교나 밀교는 신라시대에 활발히 이루어졌던 경전연구와 신행의 맥은 끊어지고, 고려시대의 사종수법도량도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으며, 그저 단순하면서도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신행생활을 추구하는 신앙으로 전개되어 갔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진언다라니나 신중탱화에 대한 신앙, 간단한 의식의 집행은 민중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었으며, 그런 상황 속에서 그나마 밀교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조선시대 불교 속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현존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의식집이나 수행서, 문화유산들을 보면 밀교적 성격을 띤 단편적인 것들이 다수 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