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밀교전개사 21

허일범 교수   
입력 : 2002-02-18  | 수정 : 200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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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사회와 밀교 고려는 돈독한 불교적 신앙을 기반으로 건국되었으며, 태조이래 공양왕에 이르기까지 그 신앙의 열기는 그칠 줄 몰랐다. 수많은 내우와 외란 속에서도 불교에 대한 열렬한 신앙심은 식지 않았고, 오히려 그 열기를 더해주었다. 흔히 고려의 불교를 기복적이며 형식에 치우친 불교로 간주하여 불교의 본지를 저버린 형태로 이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왕조가 유지되고 있던 기간동안에 개설된 수많은 도량이나 풍수지리설을 근간으로 한 일부 묘승들의 활동 때문인 듯 하다. 그러나 고려불교는 신앙적인 측면에서 어느 시대보다도 풍요로움을 더했고, 국가와 민중을 위한 현실중시의 불교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예로 진각국사 혜심은 참선공부는 나라의 복운을 가져오게 하고, 지혜의 경론은 이웃나라의 침범을 막아준다는 말을 남기고 있다. 그는 보조국사의 제자로 선에 정통한 승려였지만 참선수행도 역시 국가의 평안과 외적을 진압하는데 쓰일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고려불교계에서 국가와 승려와 수행의 관계가 설정된 것은 국가의 불교 우대정책에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즉 승려들은 국가로부터 노비와 토지를 급여 받았으며, 면세와 면역의 특전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승려가 되기를 희망하는 자들 중에는 왕자를 비롯하여 귀족의 자제들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대각국사 의천과 혜덕왕사 소현이다. 또한 과거제도에 승과를 두어 교종과 선종으로 구분하고, 거기에 합격한 승려에게는 처음에 대선이라는 법계를 주고, 차례로 승급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여 국사와 왕사가 될 수 있었다. 여기서 밀교계 종파인 신인종과 총지종은 교종에 속한다. 아울러 과거 중에서 기술관으로 등용하기 위한 의업과 주금업 분야가 개설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밀교적 소양을 기반으로 한 직종이 고려사회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원은 국가에서 지급 받는 사원전 이외에 왕실과 귀족의 희사, 농민들의 보시, 황무지의 개간 등을 통하여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면세의 특전을 누렸기 때문에 사원경제는 날로 풍요로워지고 고려의 경제를 지배하는 막대한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불교는 권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사원이 중심이 되어 물량적으로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대규모의 도량들을 거침없이 개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고려의 불교계는 국가의 번영과 외적의 진압을 중시하는 독특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갔다. 그 중에서도 이와 같은 목표의 달성을 위해서 밀교의 의식을 채용한 도량을 개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불교의 경궤 속에서 국가진호와 외적퇴치에 관한 구체적인 행법이 밀교관련 경궤에 주로 설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밀교는 당시의 시대배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국가와 민중들 속에 파고들었던 것이다. 2. 고려태조와 밀교 고려의 밀교는 현세에서 국가와 개인의 행복을 보장받기 위한 당시 불교의 시대적 특성과 왕실, 귀족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크게 융성하였다. 먼저 태조는 국가의 평안을 빌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숭불정책을 썼다. 그는 불법을 숭상하면 나라가 융성하고, 나라가 융성하면 불법도 흥륭한다는 관점에서 불교를 국교로 삼고, 많은 사찰을 건립했으며, 고승을 맞이하여 국사와 왕사로 삼고, 죽음에 임하여 훈요십조로써 불교가 호국의 근본임을 유언하였다. 그의 유언 중에는 불교를 잘 위하고, 사원을 함부로 세우지 말며, 연등과 팔관의 주신을 가멸치 말라는 내용이 있다. 먼저 사원 건립문제는 당시의 지리도참설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밀교적 관점에서 보면 도량건립을 위한 경궤의 택지법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밀교의 도량택지법은 땅의 형세와 주변환경, 수행도량으로써 적절한 곳인지를 가리는 기준이 된다. 아마도 태조의 사찰건립지에 관한 유언은 지리도참과 밀교의 택지법에 의거한 고려 독자의 사원 건립기준에 따라줄 것을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에 연등과 팔관의 주신문제는 모두 당시 고려의 습속과 결합된 불교의 의식으로 군신들이 음악과 가무 등을 통하여 제불과 천지신명을 즐겁게하여 국가와 왕실의 평안을 비는 것이었다. 이 때 의식의 본존으로 삼는 제불보살과 천지신명을 가멸치말라는 내용은 불교와 토속의 신불을 중시해야한다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불교와 토속종교의 신중들은 다 같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밀교의 본존공양법이 고려특유의 방식으로 채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형성된 고려밀교는 각종의식과 신앙방식에서도 고려특유의 양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3. 격동기의 고려밀교 고려시대의 모든 불사는 국가의 안녕과 민리민복을 위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조의 화합과 회유정책이 당대에는 실효를 거두었고, 정치와 군사제도가 정비되어 갔지만 태조 이후에도 왕권은 견고하지 못했다. 개국공신들과 그 후손들에 대한 대우문제, 왕의 외척들의 득세, 지리도참파의 반란, 거란의 침략과 금나라의 위협, 무신정권의 등장, 몽골의 침략과 간섭, 삼별초의 난 등은 건국이래 말기에 이르기까지 국내외적으로 고려사회를 불안하게 하였다. 이런 시대상황 속에서 고려의 집권세력들은 정치와 경제제도 등의 정비만으로는 사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만민의 화합과 그 구심점의 회복은 통치력만으로 이루어낼 수 없었으며, 불교에 의지하여 회복하는 길밖에 없었다. 여기서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서 우리나라 불교역사상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수많은 의식들이 집행되었다. 그들 의식은 대부분 밀교의 사종수법에 근간을 둔 것으로 상황에 따라서 식재, 증익, 경애, 항복법이 수시로 개설되었다. 우리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근래까지 정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당시의 의식도량을 그저 대중을 모으고 독경이나 하는 법회쯤으로 인식해 왔다. 그러나 그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밀교의 의궤에 따른 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밀교도량의 개설이 활발한 만큼 왕실의 왕위계승의식에 까지 밀교의 관정의식이 채용된 것으로 보아 고려불교는 밀교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송나라 불교의 영향이 약화된 반면 몽골로부터 다양한 불교문화가 유입되면서 고려불교의 내실은 더욱 풍요로워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밀교와 관련된 만다라의 수용, 오륜교리의 신앙화, 수많은 진언다라니 문화의 수용 등은 한반도 밀교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거란의 침략을 제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초조대장경과 이제현의 밀교장경, 그리고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서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은 우리나라의 불교유산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밀교경전이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