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밀교전개사 20

허일범 교수   
입력 : 2001-12-17  | 수정 : 2001-12-17
+ -
고려밀교와 팔만대장경 1. 대장경편찬의 의미 대장경은 인류지혜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역사상에서 대장경만큼 방대한 서적도 없고, 그 만큼 인류의 문화를 위해서 공헌한 서적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 원하고, 그들이 실천해야할 모든 내용이 이 대장경 속에 들어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병들고 굶주린 자를 위해서 그것을 벗어 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고매한 정신세계를 개척하려는 자에게 다양한 수행법을 제시했으며, 개인과 나라에 환란이 있을 때,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삶을 영위하도록 인간이 지켜야할 도리를 계율로써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이런 점들에 대해서 이미 신라와 고려밀교의 신앙적 특성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그 당시 사용되었던 관정경은 문두루비법, 약사경은 약사치병법 등을 제시하여 외적의 퇴치와 병환의 치료에 활용되었으며, 고려대장경이 편찬되면서 거기에 수록되었다. 우리들은 대장경이라고 하면 부처님과 같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방법을 전해주는 지침서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지혜를 구하는데 필요한 것이 대장경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보면 복을 추구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대장경에는 출세간적인 지혜의 획득과 세간적인 복덕의 성취를 위한 내용이 총망라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과거나 현재, 미래에 이와 같은 대장경을 우리들의 삶 속에서 활용했고, 활용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그 옛날 부처님과 선인들이 말씀하셨던 지혜를 빌려서 우리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가 전해진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는 자신들의 언어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앞다투어 각 지역의 언어로 번역, 편찬하였다. 그들 대장경 중에서 티베트대장경, 거란대장경, 몽골대장경은 그들의 언어로 편찬되었으며, 우리 나라와 중국, 일본은 한문으로 편찬하였다. 이들 각 지역에서 그 방대한 대장경을 번역하고, 그것을 편찬하는데 주저하지 않은 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었다. 그들은 대장경의 편찬을 통하여 불교의 자비정신을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문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문자를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서 국가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는 백성들을 하나의 가르침 속에 운집시키는데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티베트나 몽골같이 방대한 지역을 관할 통치해야만 하던 국가에서는 백성의 화합과 참여를 위해서 더욱이 불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국가와 국왕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활용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티베트의 경우, 불교의 지도자가 국왕의 역할을 하였으며, 그렇지 않은 몽골의 경우는 제사제도를 두어 국왕을 보좌하고 자문하는 역할을 하도록 한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사정으로 볼 때, 불교는 당시의 통치자나 백성들에게 삶과 다름없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방대한 분량의 대장경을 편찬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실재로 티베트는 20종류가 넘는 대장경의 판본을 가지고 있다. 몽골은 자국어로 된 대장경은 물론 티베트대장경까지도 불법의 홍포에 활용하였던 것이다. 2. 대장경조판과 국난극복 여기서 우리들은 고려시대 대장경의 편찬이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려시대 대장경의 조판은 두 번에 걸쳐서 이루어 졌다. 11세기초와 13세기 중반에 완성된 이들 대장경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첫째 목적이었다. 당시 고려는 융성한 불교국가로 다양한 불교의식과 신앙들이 국가적으로나 백성들에게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통치자들은 내적으로 불교의 바탕이 확고한 사회상황을 배경으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적을 퇴치하고 국난을 극복할 방법을 대장경의 조판에서 찾고자 했을 것이다. 여기서 11세기초 거란이 침입했을 때, 군사력을 동원하여 물리치려고 했지만 어려움에 봉착하자 대장경의 조판을 발원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런 발상을 하게 된 것은 거란에 거란어로 된 대장경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자극 받았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거란이 물러가고 대장경판도 완성되었으며, 그것은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되어 백성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거기서 국가적으로나 백성 개개인에게 불력으로 국가를 진호했다는 자긍심으로 신심도 더욱 돈독해졌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13세기초에는 몽골이 고려에 침입하였다. 그들도 역시 몽골대장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군사적으로도 강성했다. 그들은 침입하자마자 호국신앙의 구심체가 되었던 대장경을 소각시켜버렸다. 그것은 그들 자신 또한 불력을 통하여 세계를 제패하고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여기서 대장경의 소각을 통하여 진호국가정신의 의지를 꺾어 버리려 했던 것이다. 그 후, 13세기 중반 고려의 고종은 강화도에서 다시 국난극복을 위한 대장경의 조판에 착수하였다. 그것은 11세기초 소각되기 이전의 대장경이 외적을 퇴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6년간에 걸친 대역사를 통해서 훗날 팔만대장경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고려대장경을 완성하였다. 특히 여기서 우리들이 주목해야할 내용은 11세기초의 초조대장경보다 팔만대장경에 밀교경전의 수가 대폭 증가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대장경의 편찬에서 밀교경전의 중요성이 인식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3. 진호국가와 밀교경전 송판대장경은 물론 초조대장경에도 없었던 밀교경전이 팔만대장경에 대폭 수용된 것은 진호국가에 대한 의지가 그 만큼 강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아마도 그와 같은 새로운 경전들을 입수하는 데에는 그만한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마다 않고 오직 국가수호의 의지에 불타고 있던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라도 많은 밀교경전들을 수록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때 대일경과 금강정경, 그리고 천발경과 천수다라니경 등의 많은 밀교경전들이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이들 경전 중에서 대일경과 금강정경은 다 같이 국가진호를 위한 호마성취법이 들어 있는 경전이다. 우리들이 흔히 4종수법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기도를 통하여 국가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재앙을 물리치고, 증익을 가져오게 하며, 만인들로부터 경애 받는 자가 되도록 하고, 자신의 죄과를 항복 받음과 동시에 외부로부터 엄습하는 마군들을 항복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또한 다라니경전들은 다라니의 독송을 통하여 정신을 집중시키고, 독송의 공덕을 얻기 위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밀교경전이 팔만대장경의 편찬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