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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강은경(극작가)   
입력 : 2006-12-28  | 수정 : 2006-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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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이 많이 익습니다." 내 앞자리에 앉은 중년신사가 말을 걸어왔다. "글쎄요." 이목구비를 세세히 살펴봐도 초면이었다.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고향선배의 설치전시회 첫날 저녁 술자리였다. 낯익은 얼굴이든, 낯선 얼굴이든 통성명 끝나고는 곧바로 평생지기들처럼 다정해져 '남북통일을 위하여! 남녀통일을 위하여!' 건배재창을 외치며 십여 명의 인사들이 거나하게 취해 가는 마당이었다. 삼십여 분 족히 흘렀을까. 앞의 그 신사 분 갑자기 목소리 높여 "아, 맞다! 기억나요. 과수원 집 딸! 맞죠?"하는 거였다. 내가 뭐라 대답할 사이도 없이 그는 다시 몹시 흥분한 목소리로 "나 고등학교 다닐 때 1년 동안 그 집에서 자취했었어요. 그때 은경씨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요. 아, 그때 모습이 아직도 삼삼하게 남아있네요!" 세상에, 삼십여 년 전의 사람을…. 말 그대로 놀랄 노 자였다. 살다보면 우연히 과거의 사람들과 불쑥 부딪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반갑고, 때로는 당혹스럽고, 때로는 무안하고, 때로는 난감하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과거모습들을 늘어놓는 인사를 만났을 때는 그 과거가 아름다운 추억이든 슬픈 추억이든 다 아물어 가는 상체기의 생딱지를 뜯어내는 것처럼 아플 때도 있다. 그 날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앨범을 폈다. 초등학교 시절 흑백사진 속의 나의 어린 모습들을 훑어보았다. 이런 시절도 있었지, 하며. 지금의 삶부터라도 앞으론 어디서든 어느 때든 과거의 사람으로 만나질 사람들과 마주칠 때, 과거의 내가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되새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