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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

정영희(소설가)   
입력 : 2006-04-27  | 수정 : 2006-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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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오십이 가까운 나이가 되자 남자 동창들에게서도 동성에게서 느낄 수 있는 우정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공자는 쉰의 나이를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다.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 혹은 인생의 의미를 아는 나이라는 뜻이다. 모두들 한 삶을 살아내느라 눈가에 주름이 지고, 머리는 희끗희끗해져 있었다. 하늘은 절대 호락호락하니, 하늘의 뜻을 알게 하지 않는다. 나는 뒤늦게 그들을 만났지만 남학생들은 벌써 몇 해 전부터 가끔 만나고 있었단다. 더 젊었을 때인 삼십대에는 앞만 보고 달리느라 동창을 만날 엄두도 내기 어려웠기도 하거니와, 소위 세속적으로 잘 나가는 놈 몇몇만 만나곤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쉰의 나이가 코앞이 되자 세속적인 출세와는 관계없이 동심으로 돌아가서 소주를 한 잔 하고, 노래방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조용필의 '친구여'를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치과의사로 성공한 K가 언제부턴가 그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내가 안부를 묻자, 걔 원래 복잡한 놈이잖아, 하고 누군가 툭 뱉듯이 말을 했다. 내가 알기로 K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계모 밑에서 자랐는데, 그 계모와의 사이가 몹시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다행히 공부를 잘 해서 치과대학을 나와 신사동에서 개업을 해 돈을 많이 벌었단다. 그러나 K는 여전히 친구들과 섞이지 못하고 항상 불행한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어머니에 대한 모성결핍이 여성편력으로 나타나, 아직도 끊임없이 여자를 쇼핑하듯 갈아치우며 애정행각으로 지저분하게 생활한다고 했다. 반면 환경미화원을 하는 J는 동창 모임에 열심히 나왔다. J야말로 정신적 외상이 K 못지 않았다. 가난한 편모슬하에서 자라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장난치다 프레스기에 오른손을 다쳐 장애를 안고 있고,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고 했다. 어떻게 결혼을 해서 아들 하나를 낳고 잘 사는가 했더니, 아내가 어느 날 자살을 해버렸다고 한다. 동창들의 말에 의하면 한동안 J는 술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환경미화원이 되었고, 지금은 자신 보다 나이가 많은 새 아내와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내년이면 쉰 살이 되는 J의 편안한 얼굴을 보며 새삼, 지천명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행복한 사람은 상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많지만, 스스로 치유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또한 쉰의 나이가 되면 이제 인생의 의미를 알 나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