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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유일의 부부합장릉 '흥덕왕릉'

이정옥(위덕대 교수)   
입력 : 2006-03-14  | 수정 : 200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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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42대 흥덕왕은 김경휘이다. 원성왕의 손자이며, 헌덕왕의 동생이었다. 819년, 헌덕왕 11년에 이찬으로 상대등이 되었으며, 826년에 왕으로 즉위하였다. 왕은 장보고를 청해진대사로 삼아 해적의 침입을 막게 하였고, 왕의 재위시절에 당나라로부터 차의 종자를 가져와서 재배, 이때부터 차의 재배가 전국적으로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834년 복색제도를 고치고 백성들에게 사치를 금하는 등의 여러 치적이 있다. 그러나 흥덕왕은 정치적 능력이나 역사적 치적보다 왕후에 대한 일편단심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왕비는 소성왕의 딸이었고, 장화부인(章和夫人) 김씨(金氏)였는데, 왕이 즉위하시자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책봉되셨다. 그러나 정목왕후는 흥덕왕이 보위에 오른 첫해에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러자 왕께서는 보위에 있는 돌아가신 왕비만 생각하면서 결혼하여야 한다는 주위의 간곡한 청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지 않으셨다. 11년 동안을 홀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또한 돌아가면서 흥덕왕은 장화부인의 무덤에 합장하기를 유언하였다. 그리하여 흥덕왕릉은 신라 유일의 부부합장릉으로서 오늘까지 전한다. 이러한 왕의 왕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전해 내려온다. 흥덕왕은 신라 42대 임금으로 826년에 즉위했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이 앵무새 한 쌍을 선물로 가지고 와서 왕께 드렸다. 왕께서는 앵무새를 항상 가까이 두고 즐겼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암놈이 그만 죽어버렸다. 홀로 남은 수놈은 몇날 며칠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왕은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사람을 시켜 수놈 앞에 거울을 걸어주었다. 수놈은 처음에는 제 짝인 줄 알고 반가워 열심히 거울을 쪼았다. 그러나 부리에 닿은 딱딱한 거울의 감촉에 제 짝이 아닌 줄을 알고는 며칠을 더 구슬피 울다가 암놈을 따라 죽었다. 이에 왕이 앵무새를 두고 노래를 지었다고 하나 가사는 알 수 없다.(삼국유사 기이 '흥덕앵무'조) 왕비를 잃고는 다시 결혼을 하지 않은 왕은 짝 잃은 수놈 앵무새의 슬픈 심정을 누구보다 더 잘 아셨을 것이다. 죽은 암놈 앵무새 대신 거울을 걸어 주어 수놈의 슬픔을 달래려 해주려한 것도 동병상련의 발로였을 흥덕왕이었다. 지금 가사와 곡이 전하지는 않는다지만 만약 왕께서 직접 지으신 노래가 전한다면 죽은 왕비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의 노래가 아니었을까 싶다. 범상한 필부필부(匹夫匹婦)라도 흉내내지 못할 지어미에 대한 지아비의 지극한 사랑을 하신 흥덕왕의 얘기는 남녀간, 부부간의 만남과 헤어짐이 손바닥 뒤집듯 쉬운 오늘의 세태에 비추어 볼 때, 더욱 빛나고 갚진 것이 아닐까 싶다. 흥덕왕릉은 우리 대학에서 그다지 머잖은 곳에 있기에 학생들과 수업 삼아, 혹은 혼자서라도 가끔 들러 1200년 전 신라 왕가의 애틋한 사랑을 상상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