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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잇값과 지갑

정수자(시조시인)   
입력 : 2005-12-26  | 수정 : 200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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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지갑을 열라고 한다. 지갑을 잘 여는 사람이야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좋아하는 게 세상 인심이다. 밥이나 술 잘 사는 사람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지갑이 두둑한 사람 옆에는 사람이 끓게 마련이다. 또 그런 사람이 종종 정치를 이용해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반면 고집은 닫으라고 한다. 나이가 완고라는 껍질을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나이가 들수록 봐주기 어려운 게 많아진다고 한다. 하긴 혀를 차고 눈을 감을 일이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 장유유서 같은 긴 전통도 사라져가니 못마땅한 게 지천일 것이다. 문자가 등장하는 초기의 동굴 벽에도 신세대에 대한 불만이 적혀 있다니, 세대 차에 따른 문제는 영원한 숙제인가 보다. 지갑과 고집 운운은 나잇값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나이에는 그에 상응하는 역할이 전제되고, 그것으로 값이 매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잇값 제대로 하기가 쉽지 않다. 말이나 행동, 옷치장도 나이를 앞세운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는다고 감정이 다 사라지는 건 아닐진대, 솔직한 표현이나 튀는 입성 앞에선 보는 사람들이 먼저 민망해하는 것이다. 일상의 말과 행동을 모두 영화 등급 매기듯 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고집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데, 열 지갑이 없으면 체면 유지도 힘들다. 그래서 퇴직자 중에는 문밖출입을 삼가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퇴직자뿐이랴, 밖에 나가면 모든 게 돈이니 현대인의 일상은 지갑에 늘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비용을 나눠 내는 방법으로 부담을 덜지만, 그건 좀 쩨쩨해 보이는 게 여전한 한국적 정서다. 그래서 가끔씩 호방하게 지갑을 열지 않으면 동료 후배를 위해 할 일을 못하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지갑은 얼마든지 열 수 있을 것이다. 야학이나 서당, 문화유산 해설 등 마음을 열면 할 일은 많다. 절집의 보살님들처럼 궂은일을 늘 도맡아 하는 것 역시 나잇값을 잘 치르는 일일 것이다. 자신을 낮추고 따뜻한 열정만 가지면 할 수 있는 일이 도처에서 기다린다. 결국 아름다운 나잇값은 마음의 지갑에서 나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