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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 그 잔잔한 감동

김영희(시인)   
입력 : 2005-12-12  | 수정 : 2005-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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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해가 저물어 간다. 갑자기 몰아닥친 추위가 세밑의 몸과 마음을 더 움츠려 들게 한다. 얼마 전에 제법 많은 첫눈이 내렸다. 눈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내렸다. 그런데도 어떤 길은 빙판 길이 되었고, 어떤 곳은 잔설로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지난 가을 이후, 다시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선생의 고택을 찾았다. 안마당과 뒤뜰의 산수유, 감나무, 대나무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며칠 전 내린 눈의 흔적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추위 탓인지 인적도 끊어지고 고즈넉한 분위기만이 감돈다. 성북동의 호젓한 주택가 골목에 위치한 이 집은 한때 재개발업자에 의해 헐릴 뻔한 위기에 몰렸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뜻 있는 문화계 인사들이 십시일반으로 갹출하여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그야말로 시민의 힘으로 지켜낸 문화재인 것이다. 그 때의 작은 손길들이 힘을 모으지 않았다면 아마 이 집은 지금쯤 형체도 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잠시 숙연한 마음이 든다. 아무리 힘든 세상살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이 나라에는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하는 보이지 않는 힘들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모든 것 하나하나에 더 눈길이 가고 깊게 마음이 닿는다. 선생은 미술사학자로 평생 우리 것의 아름다음에 흠뻑 취해 감탄해 마지않았다. 하여,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려고 누구보다 애를 쓰신 분이다. 새 단장으로 말끔해진 이 한옥 집은 글로 보았던 선생의 성품 그대로다. 집안은 군더더기 장식이나 그 어떤 치장 하나 없이 단출하고 단순하다. 이런 것을 두고 고졸미(古拙美)라고 하던가. 그렇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정작 이런 데서 발견되고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크고 화려한 것이 당장은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힘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에는 오래 눈길이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작고 소박한 것에 더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힘이 있는 것이다. 선생은 '아름다움'에 다음과 같이 표현한 적이 있다. '아름다움이라 해도 그 갈피가 많아서 이루 헤아릴 수가 없지만, 온 세상에 가득 차 있는 자연과의 아름다움을 자기의 안목이 어느 만치 가늠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어느 만치 간절하게 느낄 수 있는가에 따라 인생의 즐거움이 크게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心散)'이라는 현판에 잠시 눈길이 머문다. '문을 닫으면 여기가 곧 깊은 산중'이라는 뜻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 살면서도 그 꽃은 진흙에 더렵혀지지 않듯, 몸은 비록 세속에 머물고 있지만 마음만은 탈속한 경지에 두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가능했으리라. 사람은 떠났지만 그의 자취는 오래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의 향기를 불러일으킨다. 잔잔한 감동의 세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