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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즐거움

정수자(시조시인)   
입력 : 2005-11-11  | 수정 : 2005-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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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에 좋은 철이다. 거리마다 단풍이 난만하고 은행나무가 광배를 두른 양 눈부시다. 돌아보면 나무만한 부처가 어디 있으랴. 잎이며 열매, 몸까지 남김없이 베풀고 가는 나무야말로 성자 이상이다. 그래서 큰 나무 앞에서는 마음이 먼저 숙여진다. 차를 타고 다니면 이런 자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없다. 문 앞에서 내려 건물로 곧장 들어가기 때문이다. 걷는 것 자체를 꺼리는 만큼 걷는 거리도 최소화한다. 걷는 시간을 답답해하는 이런 차 중독현상은 젊은 층일수록 심하다. 하긴 승용차 세대인 데다 속도가 승패를 가리는 시대이니 걷는 것을 싫어할 만도 하다. 그렇지만 마음만 먹으면 걷는 게 즐거워진다. 걸으면서 얻는 게 많기 때문이다. 환경오염 같은 거시적 문제 말고도 걸으면서 발견하는 즐거움이 적지 않은 것이다. 학교까지 10분 정도의 짧은 길도 내게는 소소한 즐거움의 연속이다. 날마다 다른 자연의 변화가 새록새록 소중하다. 만물은 말 그대로 무상(無常)하다. 같은 것이 하나도 없고 변하지 않는 것도 없다. 하다못해 돌도 변하고 자란다. 요즘은 단풍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걷는다. 단풍이 한껏 찬란하다 싶은 나무면 떠날 차례구나, 끄덕인다. 그리고 여름내 들고 키운 잎들을 곧 방생하듯 보낼 나무의 팔을 마음으로 다시 한번 쓰다듬는다. 저들은 이제 안으로 시간을 다스리며 새싹 피울 준비를 다시 하겠지. 나무들과 수인사를 하고 그 마음을 읽으며 걷는 길이 새삼 고맙다. 곱던 단풍이 이제 낙엽으로 쌓여간다. 낭만과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낙엽. 누구든 눈부신 단풍이나 벌레 먹은 잎사귀를 책갈피에 끼운 때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예전에 읽던 책을 들추면 반드시 그런 낙엽이 몇 잎쯤은 나온다. 그래서 여기저기 지정해놓은 '낙엽길'이 많은 발길을 끄는 것이리라. 이런 낙엽길이 하나 둘 늘면 도시의 길들이 한층 아름다워질 것이다. 그런데 걷기 좋은 길이 너무 부족하다. 길이 대부분 차 위주라 사람이 간신히 끼어 다니는 격이 됐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람이 진정한 주인인 길로 많은 이들이 즐겨 걸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나아가 세상의 다른 많은 길도 서로 막힘이 없는 그런 길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