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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것의 힘과 여유

정수자(시인)   
입력 : 2005-09-12  | 수정 : 2005-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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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 지나자 거리의 빛깔이 달라졌다. 가을빛이 한층 선연해진 것이다. 가만 보면 과일만 아니라 풀잎이나 나뭇잎도 날마다 다르게 가을이 짙어가고 있다. 가을물을 앉히면서 과일은 이제 저의 시간을 둥글게 마무리한다. 둥글다는 것은 부드럽고 푸근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인지 사과나 배, 감, 밤, 대추 같은 가을 과일은 우리 마음에 둥근 것들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잎 지는 가을이면 능선과 초가지붕 그리고 무덤의 선들이 둥근 것의 아름다움을 훤하게 드러내곤 했다. 원만함의 힘이 저런 것이려니 싶었다. 그와 달리 각이 진 것들은 거개가 날카로운 느낌을 준다. 둥근 것에 비해 성마르고 차가운 느낌이 앞서는 것이다. 우리가 요즘 만나는 건물이나 길은 대부분 이런 각을 만드는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간혹 눈에 띄는 곡선은 오래된 절집이나 공원의 산책로 정도니 삶이 더 각박해지는 것 같다. 이런 직선의 남발은 도시에 삭막함만 더할 뿐이다. 직선은 각이 되고, 각은 때로 무기가 된다. 책상 모서리에 부딪혀 멍들어본 사람이면 각에 들어 있는 공격성을 익히 알 것이다. 뾰족한 책 모서리에 종종 다치는 아기들을 봐도 그것의 위험성은 실감할 수 있다. 그뿐이랴, 누군가의 각진 마음에 쓴맛을 본 경험은 대부분 다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부드러운 선을 지닌 사람이 보기 좋은가 보다. 각을 줄이려면 모서리를 깎아 내야 한다. 아니면 세월의 흐름에 닳고 닳아서 자연스럽게 둥글어져야 한다. 세속의 찌든 때가 아니라 자연을 닮은 시간의 농축이 배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삶의 희로애락을 겸허하게 껴안되, '다름'에 대한 이해나 인내 혹은 관용 같은 마음공부가 따라야 할 터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완고라는 시간의 또 다른 각질을 뒤집어쓰기 십상이다. 언제 어디서든 '하심(下心)'을 견지해야 비로소 물처럼 낮은 듯 부드러운 힘을 얻게 되리라. 곧 한가위다. 한가위에는 달이 더 크고 둥글게 보인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마따나 우리의 가을도 달처럼 둥글고 풍성하길 바란다. 그리하여 둥글어진 마음으로 모난 것들을 서로 품고 가서 이 세상이 한결 너그럽고 넉넉해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