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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음 그리고 비움

이정옥(위덕대 교수)   
입력 : 2005-08-15  | 수정 : 200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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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 도둑이 들었다. 도대체 무얼 가지러 왔을까? 도둑이 가져가 값을 칠 만한 것이나 어디 있기나 할까? 컴퓨터가 없어졌단다. 아하, 그래 그것이 그 중 값나가는 것인가 보다. 그런데 요즘같이 컴퓨터가 흔한 세상, 그것이 얼마나 값쳐지는 것일까? 몇 년 사이에 눈이 많이 나빠졌다. 그걸 눈치 챈 한 갸륵한 제자가 지난 스승의 날 즈음해서 화면 큰 액정 모니터를 들고 왔다. 두어 달 가량 고맙게 잘 쓰고 있었던 것을… 아까워라. 제대로 잘 쓰는 것이 최선의 보답일텐데, 잃어버렸으니 선물 준 사람에게 미안해서 어쩌지? 또 하나, 본체에 든 모든 자료들이 없어졌단다. 가만 있자… 잠시 멍해졌다. 도둑 든 사실을 알자 잠깐 사이에 뇌리를 스친 물음과 생각들이다. 찾을 수는 있을까? 일단 신고는 하고 보자면서 수선을 떤다. 현장검증도 하고, 조서 쓰느라 파출소도 간다. 컴퓨터 없는 불편을 핑계삼아 며칠 게으름도 피워본다. 시간 지날수록 찾을 길은 점점 멀어진 듯하니, 도둑맞은 자료들이 새록새록 아쉬워진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된다. 내가 너무 많이 가진 것일까? 비록 물질은 아닐지라도, 무엇이든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또한 욕심의 소치였을지도 모른다. 실로 20년 넘게 연구한답시고 모으고 쌓아둔 자료들이 많기는 많았을 것이다. 이따금 시간 내어 정리해 보면 마땅히 필요치 않다 싶은 것들이 눈에 보이기도 했다. 버렸어도 좋을, 없어도 그만인, 그저 그런 것들도 분명 많았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쓰일지도 모른다며 미련스럽게 버리지 못한 자료들도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 가차없이 버리는 비움의 미덕을 발휘했어야 마땅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욕심이요, 그러니 더 없는 어리석음이었다. 그런데, 이참에 그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아니, 도둑이 드시어(?) 나의 미욱과 탐심을 단번에 해치웠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옛날, 부처님은 미련한 인간을 깨우치려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삼국유사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다. 외모와 차림새로 사람을 판단하는 효소왕을 깨우치기 위해 허름한 비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부처님 이야기(三國遺事 第四卷 感通 第七 眞身受供)도 있고, 아름다운 여인, 산모의 모습으로 현신하여 수도 중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을 시험한 관음보살의 이야기도 전한다. 비약일까? 비록 물질 아닐지라도 욕심부린 어리석음,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한 어리석음, 비워야 채울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을 깨치려 도둑의 모습으로 나시어 일도양단, 깨침을 주시고자 하신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하도 헛헛한 마음에 스스로 찾아본 위안도 더없이 욕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