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각의 세계를 열다

밀교신문   
입력 : 2020-12-29 
+ -

4)법난의 발생과 극복

(4)언도공판과 법난의 종결
대종사에 대한 모략중상 사건의 언도 공판은 5회의 공판을 거쳐서 다수의 스승과 신교도가 공청한 가운데 5호 법정에서 개정하고 다음과 같이 무죄의 판결을 하였다(9,12.15).
 
1.사기문제에 대하여-문교부에 조회한 회답에 의하든지 헌법 기타 증인 진술에 의하든지 심인불교는 정정당당한 불교의 한 혁신 종파로 인정하고 따라서 심인불교에 일체 희사한 것이나 희사받은 것은 사기로 인정하지 않는다.
 
2.배임 및 업무상 횡령에 대하여-자선사부에의 지출 및 13만 환 가불의 건은 모든 장부가 구비되어 있고 전수·정사회 및 이사회 인회 등 결의를 거쳐 지출한 것임으로 배임 및 업무상 횡령이 아니다.
 
3.증회 수회에 대하여 문교부 직원에 대하여는-단기 4287년(진기 8년, 서기 1954년) 5월 10일(음 4월 8일) 석존성탄절에 종교적 축하의 의미로서 행사한 것이고 하등 업무상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므로 증회 또는 수회가 성립되지 않는다.
 
4.손규식, 손원도의 사기 고소 사실에 대하여-손규식, 손원도 사실에 대하여는 최초부터 희사가 아니고 공탁한 것으로서 그 후 전액 이상 환부한 것이 장부상 및 영수증의 증거가 확연하고 또 본인이 고소를 취하하였으며 법정에서 모두 수령하였다고 증언이 있으므로 사기가 아니다.
 
5. 이영중의 희사 운운에 대하여-이영중의 300만 환 희사 운운에 대하여는 서정수의 증언에 의하여 또는 각 장부에 의하여 사실무근이 판명되었고 가옥 희사 운운은 매수 또는 환부 사실의 증거가 있으므로 사기가 아니다.
 
이와 같은 무죄 언도에 대하여 서주인 검사가 대구고등검찰청에 불복공소를 제출하였다(9,12.17). 검사가 불복 공소를 제출한 가운데 동아일보 서울신문은 심인불교 사건이 무죄 판결된 사실을 보도하였다(9,12.19). 이렇게 되자 공판의 과정에서 심인불교가 널리 알려져서 남대구경찰서장, 경북도지사, 대구시장이 대종사를 초대하여 종교의 필요성과 심인불교의 교리에 대하여 대담을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이영중의 청탁을 받았던 남대구경찰서 김식 형사가 불교관계 학원 및 재단 실태조사의 보고서를 요구하였다(9,12.24). 보고서 요구는 비구·대처승 간의 분규 문제에 기인한 조사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심인불교는 관계없다는 이유로 제출하지 않았다. 검사의 불복 공소에 따라서 대구고등법원 2호 법정에서 홍남표(洪南杓) 주심과 문양 외 1인의 판사 배석으로 공소 제1회 공판이 개정되었다(10,4.3). 이날 공판에는 피고인 전원의 출석과 스승 및 신교도가 다수 출석하여 2시간여 만에 폐정하였다. 공소 공판은 2회로 마치고 공소사건 언도 공판을 열고 공소기각을 언도하였다(10,4.13). 공소기각에 대하여 서주인 검사가 상고를 포기하여(10,4.21) 사건이 완전히 종결되었다. 이로써 약 2년간의 이영중의 모략중상 사건은 무저항 방침으로 정의는 정의로써 승리하는 법을 깨닫게 하였다.
 
대종사는 사건을 법문으로 받아들이고 불법에 잘못한 것을 참회하여 해결하였다. 곧 종단이 안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한 법난이었다. 그러나 모략 중상 사건이 무죄로 끝나서 일부의 스승과 신교도는 이영중을 상대로 무고 고발을 주장하였다.
 
대종사는 “피편은 고소를 하였으나 우리는 않는 것이 불교인이요, 인욕행이요, 이것이 무언의 승리며, 무저항의 승리요 장원 무한한 승리다.”라는 뜻으로 이해시켰다.
 
또한, 많은 스승과 신교도가 이영중, 김수련이 거주하고 있는 대명동심인당을 비워내도록 명도신청을 주장하였다. 대종사는 역시 “우리가 사용하더라도 교화에 사용할 것이요 지금 이 씨가 사용하는 것도 역시 교화에 쓰고 있으니 구경 용도는 일반이라 하필 협량하게 명도할 필요가 있느냐”며 이해시켰다. 심인당은 교화하는 곳이지 소유하는 대상이 아님을 일러주었다. 이렇게 해서 약 2년간의 법난을 거치면서 종단은 한 번 더 성숙의 계기로 삼았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대종사의 대응에서 찾을 수 있다. 처음부터 대종사는 사건을 단순히 제자의 항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혜가 어두운 제자가 벌인 어리석은 행위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사건을 일으킨 사람을 원망하거나 심한 언설로 책망하지도 않았다.
 
사건이 커지자 대종사는 “이 일은 그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법계에서 시켜서 그런다”라는 언급을 주위에 자주 하였다. 법난이 끝나고 지방경찰청에 압수되었던 재단 회계 관련 모든 서류를 찾아왔다(10,6.18). 그리하여 대종사는 현실적인 해결이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의 문제를 최소화하도록 법난을 극복하고 종단 발전을 크게 일으킬 법문을 체득하였다. 여기에는 대종사의 더 깊은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대종사는 끝까지 이영중을 교화하는 사람으로 믿었다. 그리고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교화는 심인불교의 방편으로 할 것을 믿었다. 그리고 그는 언젠가는 깨달아서 정도의 길로 돌아갈 것이라 바랐다.
 
이렇게 보면 대종사가 “하필 협량하게 명도시킬 필요가 있느냐”라고 하신 말씀은 대종사의 깊은 뜻을 엿보게 한다. 대종사의 뜻대로 이주호(李州浩·이영중)는 그 후 교화를 지속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종단에 대해서 과거를 참회하였다. 그리고 대명동심인당의 대지와 주택, 그리고 자신이 건설한 김천심인당의 매수를 요청하였다. 종단은 이주호의 제의를 받아들이고(15,3.27) 매수하였다(15,9.9). 그리고 새로운 스승을 보임하여 교화하였다(15,9.21).
 
대종사가 불법에 참회할 일만 참회하면서 상대를 다스린 무언(無言)의 승리와 장원 무한의 승리 말씀이 실현되었다.
 
5)교세의 확충
(1)5도 파견의 교화
헌법의 제정으로 종단이 체제를 세우고 교화의 활기를 더하면서 법난의 와중에도 교세는 크게 발전하였다. 헌법을 제정하는 중에 구학선이 자발적으로 교화하고 있던 태평로심인당을 심인불교에 가입 요구를 해서(7,8.24) 이를 받아들였다(7,12.18). 그러나 구학선은 자신의 욕심이 충족되지 못하자 가정형편을 이유로 탈퇴하였다(9,1.17). 그동안 법난 등의 사유로 미루어 둔 제27 육군병원이 징발 사용 중인 남산동심인당 건물 명도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교도대표의 명의로 군 당국에 제출하였다(8,4.15). 명도진정에 의해서 제27 육군병원이 남산동심인당에 현황조사를 하고(8,7.20) 명도를 결정하였다(8,11.15). 명도 결정에 따라서 남산동심인당을 인수하고(9,1.30) 교화에 사용하였다(9,2.1). 그래서 남산동심인당은 징발된 지 4여 년 만에 인수하여 교화에 사용하게 되었다. 심인당 명도를 전후하여 심인당교화와 행정 편의를 위해서 인접 주택 1동을 17만 원으로 매수하고(8,9.22), 인회 회의실 사무실 종각 숙직실 등을 건축하는(9,2.1) 한편 역시 인접 안병준(安柄俊)의 초가 3칸을 매수하여 수위실 사택으로 사용하고, 군병원이 사용하는 동안 많이 훼손된 심인당을 수리 정비하였다(11,6.3). 안병준의 초가 3칸은 대구에 처음 교화를 시작한 청정심(신길이)의 집이었다.
 
그동안 교화가 전국으로 발전하였으나 아직 심인당이 개설되지 않은 5곳의 도청 소재지가 있었다. 교화 미개척지인 5도의 도청소재지에 심인당을 개설하기 위해서 특별히 사람을 파견하여 교화를 개척하였다. 대종사는 어느 날 측근 5인을 불러서 취지를 말하고 5개 도시를 제시하였다. 다섯 인사는 대종사의 뜻을 받들어서 제비뽑기로 파견 갈 도시를 선택하고 건설 상무라는 직책을 받았다. 각기 30만환을 가지고 선택한 도시에 가서 100일 불공을 하면서 심인당을 건설하고 돌아오는 임무를 받았다.
 
그러나 청주, 전주, 광주 등 세 곳에 먼저 파견 가고 2곳은 뒤에 갔다. 모두 처음 가 본 현지에서 심인당을 개설할 장소를 물색하고 100일 정진에 들어갔다. 그 결과 100일 불공을 마치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심인당을 개설하고 교화를 시작하는 임무는 수행하였다.
 
장명(蔣明)은 청주에서 주택을 매수하고 청주심인당을 개설하였다(8,4.3). 김철(金哲) 혜공(慧空)은 전주에 파견 가서 역시 주택을 구입하여 전주심인당을 열었다(8,4.3). 김철은 자회심의 부군으로 창교 초기부터 대종사를 도와 교화의 초석을 놓는 데 힘을 보태었다. 이삼천(李三千)은 광주에 가서 주택을 구입하여 수리하고 광주심인당을 개설하였다(8,4.3). 이삼천은 태평로심인당 구학선의 부군으로 5도 파견인사 중 가장 연장자였다. 후에 구학선이 탈퇴하자 같이 종단을 떠났다. 배관천은 춘천에 파견되어 주택을 매수하고 수리하여 춘천심인당을 열었다(8,4.19). 그는 대전심인당 초기 교화에 초석을 다진 심인각의 부군이다. 권우일(權于一)은 제주도에 건너가 심인당을 건축하여 교화에 착수하였다(8,5.7). 그는 중견 공무원을 사직하고 종단에 입문하여 교화에 이바지 하였다. 5도 파견의 상무는 10월까지 심인당 개설 임무를 완수하여 그 직무를 해면하였다(8,12.28).
 
그러나 대종사는 “자기 제도 못 하는 사람에게 중책을 맡겨서 도량의 기지를 결정하게 하며 자유로이 자재와 자금을 사용하게 한 것이 잘못된 것이다”라고 술회하였다.
 
심인당 개설과정에서 일어난 문제를 법문으로 깨달아 본 것이다. 이렇게 5도의 소재지에 심인당을 개설하여 전국에 교화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5도의 심인당 개설과 더불어 각 지역의 교화도 나날이 발전하였다. 울릉도의 교화가 크게 일어나서 배관천이 심인당을 열어 신교도들이 스승없이 신행하고 있던 도동심인당을 건축하여 교화 환경을 개선하였다(7,9.10). 그리고 대종사의 탄생지인 사동에 심인당을 건축하여 교화하였다(8,1.11). 교도들이 울릉 각지에서 모여들어서 남양동에 심인당을 개설하고 60만 환을 보내어서 교도들 자신이 수행하게 하였다(8,4.30). 이어 천부동에 심인당을 열고 교도들이 스스로 수행하게 하였으나(8,3.15) 교화는 부침을 하였다. 또한 현포동에도 심인당을 개설하여 교도끼리 수행하였으나 얼마 후 폐지하였다. 울릉도 교화는 포항의 교화에 영향을 크게 받았다. 포항지역에 신교도들이 날로 불어나서 각지에 심인당을 개설하였다. 신교도들이 스승 없이 신행하고 있던 기계면 용기심인당을 건축하고(7,10.19), 같은 날 계동심인당을 개설하고 건축하였다. 포항 북부지역 흥해에 주택을 빌려서 심인당을 개설하고 오특문이 지도하게 하였다(8,1.6). 죽장면 입암에 주택을 4만 환에 매입하여 심인당을 개설하고(8,6.7), 또한 그날 입암 인근의 두마동에 주택을 2만 환에 구입하여 수리하고 심인당을 개설하였다. 포항 남서쪽에도 몰려드는 신교도를 위해서 심인당을 열고 교화를 하였다. 구룡포에 주택을 빌려서 심인당을 열고(8,3.9), 죽도에 주택을 매수하여 심인당을 개설하였다(8,3.20). 그리고 괴동에 주택을 매수하여 괴동심인당을 개설하고(8,4.17) 다시 심인당을 건축하였다(9,12.8). 괴동심인당은 포항제철이 세워지는 바람에 철거되었다.
 
(2) 이원식 심인당 구조
심인당마다 신교도가 불어나서 심인당 개설을 계속하고 또한 심인당 교화환경도 개선하였다. 손원도(회정(會精))가 개설한 안강심인당을 건축비 45환을 지불하고 인수하고 해인행을 파견하여 교화하였다. 손원도에게는 전교 스승으로 교화를 돕게 하였다(7,8.24). 손원도는 포항에서 교화에 참여하였으나 인법에 걸려서 포도사(布導師)에 임용되어(5,3.13) 심인당 건축을 돕다가 사직하고 안강심인당을 개설하였다. 그래도 교화의 의지로써 다시 전교 스승으로 교화하였다. 손원도는 결국 전교 스승으로서 교화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퇴하고(8,4.2) 법난에 가담하였다. 그 후 손해봉(孫海棒)으로 개명하여 스스로 혜통국사를 종조로 하여 참회원을 만들고 교화하면서 후에 진언종으로 개명하였다.
 
그 후 경주지역의 심인당 개설과 환경개선은 물 흐르듯 계속되었다. 주택을 매수하여 가정(柯亭)심인당을 개설하고 박현기(朴顯機·도흔(道欣))가 지도하였다(8,4.30). 불국(佛國)심인당을 개설하고(10,3.20), 건천에 주택을 빌려서 심인당을 개설하여(10,4.1) 각기 교도가 스스로 수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어일심인당을 주택을 임차하여 개설하고 교도가 자발적으로 수행하였다(11,12.8). 황오리심인당을 사택과 심인당을 분리한 이원식(二元式)으로 개축하고(10,12.8) 이어서 대지를 더 매수하여 심인당 환경개선을 하였다(11,4.1). 그래서 교화를 위한 출세간의 공간인 심인당과 생활을 위한 세간의 사택을 이원으로 분리하는 심인당 배치를 세웠다. 교화는 대구 경북지역에도 왕성하게 진행되었다. 대종사가 수행한 농림촌 인근 성서에 주택을 임차하여 심인당을 개설하고(7,12.16) 다시 심인당 건물을 매입하였다(10,9.1). 삼덕동에 심인당 건설을 결의하고(7,12.18) 대지를 매입하고(12,4.24) 건축 중에 심인당 건물이 붕괴하여 법문으로 받아들이고 심인당 개설을 중지하였다(15,7.16). 청도군 삼신동에 서 씨 재실을 6만 환에 매수하여 심인당을 개설하고 교도가 자유로이 수행하게 하였다(8,4.19). 이즈음 양동에서 교화하다 양수원에 머물고 있던 유인광이 자유로이 교화하기 위해서 영천군 금호에 주택을 임차하여 교도를 모아서 교화하였다(9,2.3). 또한 대구 서북부에 왜관에 송두남, 손대련이 출장하여 주택을 빌려서 심인당을 개설하고 대봉심인당의 권수교(權秀嬌)을 파견하여 교화하였다(11,4.5).
 
이와 더불어 심인당 환경개선을 위해서 신암동심인당 사택을 매입하고(8,6.7) 대구시 소유인 대봉심인당 부지를 경쟁 입찰로 구입하고(9,3.22) 기존의 심인당을 철거하고 심인당과 사택을 각기 이원식 건물로 개축하였다(10,12.7). 또한 내당심인당과 신암심인당을 수리하여 이원식으로 만들었다(10,12.11).심인당의 개설과 건물의 개축은 교화의 활기에 부응하여 바삐 진행되었다. 부산 수정동에 귀속재산의 건물을 45만 환에 매수하여 심인당을 개설하고 원오제가 자발적으로 교화하는 초량심인당을 이곳으로 옮기고(8,4.19) 다시 건물과 대지를 불하받았다(8,8.16). 동래 온천에 대지를 매입하고 그곳의 판잣집에 임시 심인당을 개설하고(8,5.17) 후에 판잣집을 헐고 심인당을 개축하고 교화환경을 개선하였다(9,11.24). 밀양 유천에 신교도가 자발로 심인당을 개설하여(8,8.9) 다시 심인당 부지를 매입하여 교화하였다(9,12.26).
 
밀양심인당 교화의 활성화를 위해서 심인당을 개축하고 대종사와 손대련이 참석하여 준공하였다(10,8.23). 나아가 서울심인당의 신교도의 수행 편의를 위해서 영등포에 대지를 마련하고 심인당을 건축하였다(9,11.20). 이로써 서울 한강 이남의 교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4면-남산동 심인당 (희락) 1..jpg
대구 희락심인당 옛 모습

 

-진각종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