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각의 세계를 열다

밀교신문   
입력 : 202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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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종단체제의 정비와 교학의 증진

3)교육사업과 사회참여 활동
 
(2)자선사부와 직포공장
심인중학교의 설립재단으로 직포공장을 설립하기 위해서 종단에 자선사부(慈善事部)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7,9.10). 심인중학교 설립 등 간접 교화를 위해서 교화활동을 이부(理部)와 자선사부로 구분하였다. 교리와 수행을 통한 교화 활동은 근본적인 교화 활동이라는 의미에서 이부, 국가 사회에 참여하고 기여하는 교화 활동은 구체적인 자비의 활동이라는 뜻에서 자선사부라고 하였다. 이부는 심인당의 직접 교화를 말하고 사부는 교육과 복지 나아가 사회참여 활동을 말한다. 서울에 자선사부를 설치하고 자금 25만 환을 찬조하기로 하고, 이부와 자선사부의 자금을 상호 유용하기로 결의하였다(7,12.21).
 
처음에는 희사금도 이부와 사부의 용도를 달리하여 사용하기로 하였으나, 사부의 자금조달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심인중학교 설립재단인 직포공장 부지를 대구시 비산동심인당 앞 공지로 결정하고(8,3.15), 공장의 설비를 시작하여 모든 기구 구입은 손규복에게 일임하였다(8,4.30). 직포공장의 건축이 완공되어(9,2.14) 공장 명칭을 삼정직조(三淨織造)공장으로 정하였다(9,2.14). 양수원과 함께 자선사부를 담당 경영하던 자비인이 사퇴하여 임경덕이 담당하고(9,4.13), 삼정직조공장도 임시상무로서 겸무하였다(9,6.27). 삼정직조를 삼정견직으로 명칭변경하고 설비를 확충하였다(10,11.12). 삼정견직에 도난과 화재 등 사건에 일어나서 삼정직조로 명칭을 환원하고 시설을 넓혔다(10,12.24). 공장의 경영을 활성화하기 위해 이용규(李容奎)가 상주하여(11,7.29), 설비를 일부 변경하였다(11,8.2).
 
심인중·고등학교의 수익사업으로 시작한 직조공장은 여러 문제를 극복하면서 운영을 지속하였다. 삼정직조공장의 기계 건물 가공시설 염색시설 등의 확장공사를 시작하고(11,12.3), 명칭을 동광(東光)직조공장으로 변경하였다(12,4.3). 대종사가 공장의 확장공사와 운영이 본궤도에 오르도록 7개월간 공장에 주재하였다(12,4.28). 그리고 종단의 사업부문의 최고책임자를 총재로 결정하고 인회장을 총재로 추대하였다(13,3.27). 동광직물공장 전무 손규복을 허동석 씨로 교체하고 허 씨가 숙련될 때까지 당분간 공장일을 돕기로 하였다(13,5.25). 동광직물의 제품을 위탁판매에서 직매하기 위해 동대문시장에 직매상사를 설치하였다(13,6.28). 국내 섬유계의 극심한 불황으로 계속 운영하면 적자가 증가되고, 또한 밀교에서 사업경영은 어렵다는 현증 결과로 동광직물을 휴업하였다(13,11.23). 결국 동광직물공장의 설비 일체를 임차할 것을 결의하고(14,1.20), 김상화(金尙和)를 상대로 임차 체결하였다(14,3.2). 그리고 직매상사의 명칭도 원창상회(圓昌商會)로 개칭하기로 결의하였다(14,5.30). 원창상회도 운영이 부진하여 적자가 계속되어서 이를 청산 정리하고 금강회에 수입으로 잡고 원창상회는 폐지하였다(16,3.22). 동광직물공장은 그 후 청원(淸原)견직에서 보생(普生)견직으로 개칭하였다(17,12.2). 그리고 종조의 열반 후 동광직물과 원창상회의 최종 보고를 인회에서 하였다(17,12.26).
 
(3)양수원과 미장원 설립
종단은 일찍부터 양수원의 설립을 계획하여 왔다. 원오제가 교화 중 많은 마장이 일자 양로원을 경영하는 조건으로 사퇴할(5,9.15) 당시부터 양로원 경영은 예상하였다. 그러나 원오제가 양로원 경영을 사절하고 자발적으로 이혼하여 교화에 나섬에(6,12.10) 따라서 양로원 설립을 일시 연기했다. 그러나 곧 자녀가 없거나 딸만 있는 신교도를 부양하기 위해서 양수원 설립을 결정하였다(8,2.15). 그리고 양수원 수용규례(8,6.28)와 운영방침을 정하였다(8,7.5). 양수원 수용규례는 6개항으로 양수원 입원자격 입원승인 퇴거사항 등을 정하고 있다. 심인공부를 4년 이상 공부하고 6촌 이내의 친족이 없는 60세 이상의 신교도를 대상으로 하였다. 그러나 스승의 부모는 조건 없이 총인회의 승인을 얻어 들어갈 수 있었다.
 
양수원의 입원은 신교도가 원칙이나 경우에 따라서 스승도 허용하였다. 양수원 운영방침은 양수원 자본금과 사업 그리고 이윤금의 처리 등을 담았다. 양수원은 수시 자주적으로 적당한 업종을 선택하여 자치적으로 운영할 수 있고, 자본금은 자선사부에서 적당한 범위 내에 찬조하고, 이윤금 처리는 정공과 원금적립을 우선하고 관리비와 운영비 등의 순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자비인이 담당 경영하던 양수원은 정도(正道)카라멜의 운영도 하였고(9,4.13) 자비인의 사퇴로 임경덕이 담당 경영하였다(9,4.13). 자선사부의 일로서 미장원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남산동심인당인접 주택과 부지를 구입하여 스승과 신교도의 숙박소 미장원 신문지국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개축 결의하였다(10,6.11). 그곳에 미장원의 건물을 개축하고(10,12.3) 삼정(三精)미장원이라 하였다. 미장원의 설치는 당시의 의식개혁과 관련이 있었다.
 
심인불교는 전래의 인습을 바꾸기 위해서 의식주의 생활 등을 개선할 것을 강하게 권유하였다. 단색과 어두운색의 의복보다는 밝고 환한 오색(五色) 옷 등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마찬가지로 두발의 모양도 시대에 맞게 고치도록 종용하였다.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는 유연한 생각과 밝은 생활을 권장하였다. 그리고 삼정미장원은 남산동 심인당 바로 앞에 있어서 여성 신교도가 심인당에서 불사를 마치고 미장원으로 가서 머리를 바꾸게 권하였다. 미장원의 경영은 교화의 방편으로 시작하였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폐지하였다(13,12.14). 삼정미장원은 부인 신교도의 편의를 위하여 설치하였지만 사회변동에 의해서 사회에 미장원이 점차 증가되었기 때문이다. 그 건물을 개수하여 원력심인당을 개설하였다(16,11.29). 원력심인당은 종단에 근무하는 종무원들이 일반 신교도와 구분하여 수행하도록 하려는 취지에 개설하였다.
 
(4)사회참여 활동
교화활동은 사회 정치 경제 등의 변화에 따라서 교화방편을 다변화 하여야 한다. 한국전쟁 이후 장병의 정신강화를 위해서 종교의 군포교가 시작되었다. 불교에서도 군종포교를 실시하였다. 종단은 불교군종포교사회에 5000만 환을 지원하기로 결의하였다(7,8.25). 당시 해방과 전쟁 후 계속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적성국 중립감독위원회를 축출하려는 운동에 크게 일어났다. 종단은 신교도 1,500명과 심인중학교 학생 500여 명이 국민회 경북지부와 애국단체연석회의가 주체하는 적성감독위 축출 시위에 참여하였다(9,8.25). 또한 국제정세를 토의하기 위한 회의에 손대련(孫大鍊)이 참석하였다(10,11.3). 이 연석회의에서 북한동포의거촉진국민대회를 조직하고 이를 위한 국민운동을 일으키고 시위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국민대회는 심인불교의 신교도와 심인중학교 학생 약 400여 명 등 많은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대구역 광장에서 3일간 시위를 하였다. 여기서 심인불교는 대통령의 메시지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애국단체연합회의가 대구역 광장에서 개최한 재일동포북송반대 궐기대회에 중·고등학교, 정당, 사회단체, 종교단체 등과 심인불교 신교도 300여 명이 동참한 가운데 손대련이 유엔총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였다(11,3.16). 그리고 경북국민회의가 국립극장에서 개최한 동유럽 헝가리의 반공의거에 참가한 정태군(鄭太君)의 환영강연회에 손대련이 참석하였다(11,4.3). 이러한 과정에서 경북지사 대구경찰서장 등의 초대에 응하여 심인불교의 교리와 종교의 필요성을 이해시키고 사회정세와 당시 종단 상황 등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불교문화재 보존과 재난재해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해인사 중수와 국보장경 수호 찬조금 30만 환, 그리고 부산화재의연금을 기탁하였다(8,12.14). 동부지구에 폭설이 내려서 설화를 많이 당하여 의연금을 보냈다(10,3.18).
 
4) 법난의 발생과 극복
 
(1) 법난의 발생
헌법의 제정으로 행정 및 교법체계를 정비하여 가는 가운데 종단에 큰 법문이 일어났다. 그동안 대종사의 신임을 받아온 이영중 부부가 주위 사람에게 불만을 부추기고 포섭하여 인회(印會)의 자리에서 스승사퇴를 선언하고(8,7.5) 대명동심인당의 ‘십이불납선언’을 하였다(8,7.12). 대종사의 독재 밑에서는 더 이상 교화를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십이불납선언’은 희사금의 2/10를 본부에 납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영중은 초기에 입교하여 건축 상무의 일을 맡아서 일하면서 부인 김수련(金樹蓮)과 대명동심인당에서 교화를 하고 있었다. 그즈음 종단의 체계를 세워가면서 특히, 스승의 자격과 공사(公私)의 문제를 엄격히 다루었다. 공사의 문제를 엄격히 세우는 과정에서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 즉 배덕원, 손원도, 손규식 등이 이영중을 부추겼다. 이영중은 동조자를 대동하고 서울심인당에 찾아가서 ‘보살회재산을 반분해 달라’는 협박을 하고(8,7.15), 김수련은 대명동심인당은 심인불교에서 탈퇴한다고 인회에서 선언하였다(8,7.17). 김수련이 이탈선언을 하자 종단은 당일 인회에서 3개항을 결정하고 교도에게 공지하였다. 김수련이 심인불교를 탈퇴하고 대각사로 가려는 사실과 보살회유지재단의 성격을 알리고, 신교도는 자신의 노선과 태도를 분명히 할 것을 공지하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이영중과 배덕원이 인회의 결정에 대하여 5개항의 문제에 답할 것을 요구하는 항의서를 제출하였다(8,7.22).
 
이영중, 김수련의 이탈 상황에서 교도 중 청구대학생 강신화(姜信和)가 종단의 승인 없이 명의를 빌려서 심인진리 본원(本源)이라는 모호한 책자를 발간하였다. 종단은 심인불교의 교리와 관련이 없으므로 현혹되지 말 것을 알리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8,7.17). 이영중은 이미 응원사 김원경 등의 사주를 받아서 심인불교를 반분하여 대각사(大覺寺)라는 명칭으로 교화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하였으나, 그때마다 부당한 요구를 하다가 배덕원, 김원경 등의 이름으로 ‘불교모독에 관한 건’이란 16항의 모략 진정을 대구경찰서 경찰청 치안국 검찰청 문교부 등 각계 요로에 보냈다(8,9.3). 모략 진정서는 주로 심인불교의 교리와 운영, 그리고 희사금 사용에 대한 내용이었다. 심인불교는 유사종교이며 독단적으로 운영하고 희사금을 유용한다고 주장하였다. 진정서를 제출하고 김원경은 남대구경찰서 김식(金埴) 형사에게 50만 환을 전달하여 심인불교 사건을 확대시켜 주도록 부탁하고, 또한 이영중, 김원경은 지인 및 동창생이 모여 심인불교 재산의 반분을 요구하고, 결국 심인불교를 인수하여 교화방편을 빼앗으려는 밀회를 하였다(8,9.4).
 
그러나 대종사는 종단의 사건에 대하여 “이것이 다 진리로는 급진적으로 발전하는데 완전한 교리를 구비하지 못한 까닭이다”며 법문으로 받아들였다. 김원경의 부탁을 받은 김식은 신 형사와 함께 재단장부 및 회의록을 압수하였다(8,9.5). 그리고 이영중은 압수한 심인불교의 장부 2권을 들고 응원사에서 김원경과 장부내용을 조사하고(8,9.6) 사건의 구체적인 계획을 경상북도 장학사 유시관(柳時寬)에 부탁하였다. 그는 이영중의 뜻대로 대명동 대봉동 동인동 침산동심인당과 심인중학교를 대각사에 소속시키려는 심인불교의 분립안을 교섭하였다(8,9.15). 교섭안이 뜻대로 되지 않자 이영중은 재단이사장 이하 이사 감사가 사직하고, 자기에게 재단임원 개선의 권리를 일임하고 신교도 대표에 추천해 줄 것을 요구하는 각서를 제출하였다(8,9.22). 이영중의 획책에 동조하여 조계종 경북종무원장 박도수는 심인불교재산을 조계종에 귀속시켜 달라는 요지의 ‘유사종교단체해산’ 진정서를 대구경찰서장에게 제출하였다(8,9.24). 종단은 아직 우리나라에서 종교 법률에 대한 인식이 당국자까지도 미숙하여 이러한 진정을 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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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종 역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