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각의 세계를 열다

밀교신문   
입력 : 2020-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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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창교와 초기 교화

(2)교화 방안과 교육

참회원의 교화 중에는 외마 뿐만 아니라 내마(內魔)도 일어났다. 그것은 교화자와 신교도의 문제였다. 교화자의 자격에 관련하여 교사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아직 자기도 제도 못 한 사람을 중생교화에 지도자로 뽑아서 포교문을 연 까닭으로 더욱 마장이 심했다(2,12.12). 스승 진리가 어두운 까닭이다(3,7.30). 일원주의에 전도한 설법으로 인해서 부득이휴직하게 하였다(3,12.12). 소실 둔 남편만 무자격한 것을 발견 실행 중에 교도 가운데 허다히 보는 바와 같이 역시 소실 둔 본부인은 자격이 없다는 것이 누구나 다 남편과 가족을 화도 못하는 것은 분명하게 나타나 있음으로 어찌 자기 가족을 제도 못하고 남을 제도하랴. 그러므로 부득이자진 사퇴하게 하였다(5,9.15). 가정 외도로서 인법(印法)에 맞지 아니하여 교화에 지장이 막대하므로 정사직을 사면하고(5,3.30).”

 

교화자의 자격을 인법이라 부르고 인법에 어긋나는 사람은 정사, 전수로서 교화 자격을 주지 않았다. 인법은 심인법의 준말로서 심인에 비추어 적절하지 못하면 교화자의 자격이 없다는 의미이다. 먼저 소실을 둔 남자와 본부인이 인법에 어긋났다. 자기 가정을 제도 못 하면서 남을 제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법에 따르기 위해서 출가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인법에 잘 맞지 않는 경우는 일원주의 설법을 하였다. 일원주의 설법은 자기는 실천하지 못하면서 학식을 유세하듯이 설법을 하는 것이다.

 

마음의 자만심, 즉 상()을 항복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화 초기에 소실 둔 남편 중에 대표적으로 배덕원과 손원도를 들 수 있고, 소실을 둔 아내는 김희옥과 윤신진이 대표적이다. 윤신진은 결국 출가하여 교화를 계속하였다.

 

참회원은 일찍부터 교화스승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먼저 교화스승을 기회 있을 때마다 모아서 강습을 하였다. 그 후 강습은 매월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필요에 따라서 임시 강습도 하였다. 그리고 강습을 강공(講工)으로 개칭하였다(6,9.4). 강공은 매월 정기적으로 열었지만 겨울 12월과 여름 78월은 추위와 더위로 중지하였다(6,9.5). 그리고 도량에서 심공은 자유롭게 하였다. 그런데 춘분부터 추분까지는 저녁공부를 주로 하고, 추분부터 춘분까지는 아침공부를 주로 하였다. 아침 오전 5시에 종을 치고 515분부터 공부를 시작하고, 저녁 6시에 종을 치고 7시부터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방에 따라서 공부시간은 달리할 수도 있게 하였다. 참회원 시기에는 도량에 종을 설치하고 공부시간을 알렸다. 그리고 공식 낮 공부는 10시부터 2시간 동안 하였다. 대중이 동참하는 공식불사가 실시되면서 언제쯤인가 죽비(竹篦)가 사용되었다.

 

 죽비는 스승이 불사를 진행하는 법구(法具)로서 법구가 사용되기 이전에는 손뼉으로 대신하였다. 그 시기에 일요일을 자성 찾는 날의 의미로서 자성일(自性日)’이라 부르고 특별히 중요하게 심공을 하였다. 공식 낮 불사는 정사 전수가 지도하고 해인(海印)을 공부하고 설법도 하였다. 해인은 각해심인의 준말로서 공부에 필요한 경전이나 설법의 자료를 말한다. 해인은 주로 대종사가 교화자 강공을 위해서 준비하고, 다시 심인당에서 교도와 공부하게 하였다. 그 해인을 달리 꼬지경(꽂이경)’이라 불렀다. 심인당 전면에 걸어서 신교도와 함께 공부한 데서 붙인 명칭이다. 심인당 전면에 걸어둔 꼬지경을 공부하면서 법대(法帶)가 사용되었다. 꼬지해인의 글자를 한 글자씩 짚는 긴 대나무 막대를 법대라고 불렀다. 신행이 깊은, 즉 법을 잘 지키는 보살이 법대를 짚었는데 법대보살이라 일렀다. 법대의 실시는 해인의 내용에 집중하게 하고 글을 모르는 신교도가 글을 깨우치게 하는 목적이 있었다.

 

스승의 심공은 특별히 정한 규정이 없이 용맹정진하게 하였으나, 다시 정사, 전수 그리고 지원대표자 간부 등 교화 종사자는 심인염송을 매일 일만독()을 철저히 하는 규정을 세웠다(6,2.7). 그리고 심공 중에서 특별한 심공은 강도라 하고 필요에 따라서 강도를 하였다. 남산동 교화 중 외부의 압박에 의해서 일시 교화가 중지되고 교화단체참회원을 경북도 공보과에 등록할 때 박석윤의 사택에서 일 주간 강도하였다(2,5.30). 서울 심인당 건축을 위하여 전교 일제히 일 주간 강도를 실시하였다(6,10.5). 또한 신교도의 소상(小喪) 대상(大喪)의 파재일에 강도를 하도록 하였다(7,3.3). 교화자의 자격과 심공의 방안이 차례로 마련되면서 참회원은 심공 방편도 실험적으로 시행하였다. 육자심인 염송의 신행체험과 교학체계의 이득 과정으로 남자는 아미타불 본심진언 단야타 옴 아리다라 사바하를 염송하고 여자는 육자진언을 염송하였다(7,7.2). 남녀의 성정에 따라서 각기 부합하는 진언염송을 하여 이원상대의 심공을 세우려는 방편이었다. 그러나 미본진언 염송은 마장은 있고 증득되는 일이 없어서 폐지하였다(11,10.9). 또한 참회원은 대소사의 행사를 양력으로 시행하기로 하였다(7,3.3). 심인 밝히는 수행은 양()에 부합하고 번뇌를 없애는 일은 음()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3)공민학교 개설과 조국통일기원강도

교화자의 교육과 더불어 신교도의 교육도 필요하였다. 처음 교화를 하면서 신교도 중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서 국문 강습을 시작하였다. 강습의 수강생이 증가하여 당국의 수속을 밟아서 건국고등공민학교를 도량 내에 개설하였다(3,3.1). 강사는 신교도 중 신옥(申鈺)이 맡았다. 그러나 건국고등공민학교는 6·25전쟁 직전 폐지하였다(4,5.15). 당시에는 교육환경이 매우 열악하였다. 심인불교는 다시 오서근이 운영하던 공민학교를 인수하여(7,6.5) 심인고등공민학교로 개명하고 대종사가 초대 교장을 받았다(7,6.6). 그리고 경북여자고등학교의 가교사(假校舍)를 차용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가교사는 낮에는 경북여자고등학교가 사용하고 밤에만 공민학교가 사용하는 조건으로 차용하였다. 그때 야간부 남녀 1, 2학년 2학급으로 112명이었다. 심인고등공민학교는 후에 심인중학원에 이어 심인중학교로 발전하였다. 심인불교참회원은 직영 고등공민학교의 운영자금을 본원과 각 지원의 찬조로 지원하기로 하였다(7,7.7). 6·25전쟁이 휴전되고 나서 불교청년회가 조국통일기원대제를 열기로 하고 동참을 요청하였다. 참회원은 기원대재에 동참하기로 하고 미리 조국통일서원강도를 올리기 위해 강도절차와 동참취지문을 첨부하여 공문을 각 심인당에 보냈다(7,7.29).

 

한국불교의 신세대의 생활불교 확립에 매진하는 불교청년회에서 조국통일기원대제의 88.9.10일 거사를 앞두고 전체 불교도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작금에 있어서 심인불교 각 지원에서도 신교도들에게 차취지를 주지시켜 89일 자성일은 좌기 요령에 의하여 조국통일강도를 하기로 요망.”

 

조국통일기원 강도 공문에 첨부한 강도절차는 당시의 강도의 일면을 볼 수 있다.

 

“I.조국통일기원강도절차 1.서원강도 시작 2.부처님 출세해인 낭독 3.열반요문 낭독(전몰 장사 영식을 위하여) 4.염송 5.마음은 곧 부처요 부처는 곧 마음인 고로 불법은 마음의 법이라해인낭독 6.서원강도 마침 II. 강도시간은 자성일 첫 시간에 실행할 것.”

 

여기서 특이한 내용은 자성일과 자성일 공부는 첫 시간과 둘째 시간으로 실시한 것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동참취지문은 희사에 대하여 말은 아니 할 것이로되 이와 같은 일은 처음이라 상식을 가르쳐서 이후로라도 다 알고 실행하기까지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여 기원대재에서 심인불교 신교도는 반드시 희사를 실시할 것을 강조하였다. 세상에 희사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신행을 보여주려 하였다. 대구종합운동장에서 개최된 조국통일기원대재에 전 교도가 참가하였다(7,8.8). 참회원은 교화 초기부터 해인을 한글 위주로 만들었다. 남산동에서 공민학교를 열어서 국문학습을 실시하고 사회에 한글보급 운동을 하였다. 남산동 참회원을 신축하여 참회원의 해인판에 한글로 된 해인을 부착, 게시하여 공부하였다. 참회원은 도량의 전면 벽을 해인판이라 부르고 육자진언을 비롯하여 중요한 해인을 부착하여 공부하였다. 한글사용에 대한 참회원의 사실이 알려져서 당시 최현배 등 한글학자들이 한글 보급의 좋은 실례로서 찾아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특이한 사항은 대종사가 대한 불교도 군포교사의 고문이 되어 심인불교에서도 유자격자를 5명 임명하기로 하고 추후 통지하기로 하였다(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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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각종 역사에서-